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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탄의 보름달
이름: 노시경 ㅣ 작성일 : 2006-08-26 오후 10:44:46


빈탄 가는 길

아시아 여행. 때로는 힘들고 피곤하지만 이국에서의 잊지 못할 추억들은 해마다 나의 발길을 해외로 향하게 한다. 싱가포르 타나 메라(Tanah Merah) 페리터미널. 인터넷으로 예약한 빈탄(Bintan) 행 페리 예약서를 제시했다. 인터넷으로 예약해서 잘 예약이 되었는지 약간 걱정을 했는데, 페리 선사에서는 우리 가족의 인도네시아 입국카드까지 인쇄하여 건네준다.


고속 페리가 싱가포르를 미끄러지듯이 떠나기 시작했다. 열대 바다가 창가의 바로 눈높이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창가에 앉은 딸 녀석은 페리의 창밖에 펼쳐지는 바다의 빛깔을 감상하고 있다. 하늘은 구름 속에 얼굴을 감추었다가 다시 내밀곤 한다. 가끔 소나기 빗줄기가 쾌속선의 왼편을 때리고 지나간다. 맑은 날인지 흐린 날인지 정확히 규정하기가 어려운 날씨이다.


나는 페리의 한 자리에 앉아 잠시 과거를 회상해 보았다. 나는 십 여 년 전에 싱가포르에서 페리를 타고 빈탄 옆의 바탐(Batam) 섬을 향하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행의 저렴한 항공권을 구입하기 위하여 바탐 섬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기억이 머리 속에 선연하고, 바탐 섬 택시 기사와 언쟁이 붙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십 삼년이 지났다. 지금 내 옆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여름날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으며, 그 아내 옆에는 토끼 같은 딸 녀석이 적도의 바다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가끔 싱가포르로 향하는 거대한 유조선이 시야의 전면을 압박해 들어온다. 작은 섬나라인 싱가포르에 저토록 많은 화물선이 몰리는 이유는 훌륭한 지정학적 위치와 근면한 지도자를 만난 덕분일 것이다. 눈을 들어 전면을 보니 TV에서는 빈탄을 광고하는 화려한 화면이 여행자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페리는 약 55분간 바다 위를 달려 우리 가족을 빈탄의 벤다르 벤탄 텔라니(Bendar Bentan Telani) 페리 터미널에 내려주었다. 터미널에서 10US$에 인도네시아 비자를 사고 인도네시아 입국심사를 받았다. 입국심사대의 직원들 태도에서부터 싱가포르에 비해 이완된 인도네시아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한 사람의 입국심사와 여권을 검토하는 데에 3명의 직원이 앉아있다.



빈탄의 해변을 거닐며


앙사나(Angsana) 리조트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적도의 바다가 바로 눈앞에 펼쳐진 리조트 4층의 숙소에 짐을 풀었다. 서울에서 수영을 배운 딸 녀석은 널따란 수영장과 해변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우리는 주저할 것 없이 해변으로 내려왔다. 해변에 사람이 많지 않은 한적함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해변의 파라솔 밑에 누우니 이 세상 근심은 다 사라지는 것 같다. 누워서 보면 내 발가락 멀리 모래사장과 바닷물이 보이고 해변을 때리는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짙푸른 하늘에는 새털구름만이 흘러간다.


적도의 바다 속으로. 발에 한번씩 찰랑이는 바닷물의 감촉이 좋다. 바다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잠시 후 나는 해변의 모래사장 속에 몸을 묻고 잠시 눈을 붙여 보았다. 이 여유를 느끼기 위해 비행기로 하늘 위를 6시간 날고 배로 바닷물 위를 1시간 스쳐서 이 모래사장 안에 몸을 누인 것이다. 나는 회사의 숨 돌릴 틈 없는 업무에서 탈출하여, 이 모래 속에서 일상의 일탈을 즐기고자 했다.


그러나 나의 평화로운 휴식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다. 딸 녀석이 바다 위에 널린 조개껍질을 같이 모으러 가자고 보챘기 때문이다. 바다에는 불가사리 모양이 조각된 듯이 파인 ‘샌드 달러(Sand Dollar)’라는 조개껍질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껍질의 불가사리 문양은 다른 물고기들의 공격을 피해보려는 조개들의 고육책이다. 딸 녀석의 손에는 벌써 이 샌드 달러가 가득 찼지만, 나는 딸의 강요로 계속 조개껍질을 주우러 다녔다.


한가하게 해변 산책을 하고 있으려니, 손가락만한 투명 물고기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그리고 게 한 마리가 순식간에 도망을 치는 것이 보인다. 딸을 불러 이 초록색 게를 보여주려고 하였으나, 게는 이미 게눈 감추듯이 숨어버렸다. 게를 잡으려고 모래사장을 힘차게 팠지만, 게는 이미 도망가고 없고 모래사장에는 꽤 큰 구멍만이 생겼다. 바다 모래사장 위에는 조개들이 뚫어 놓은 구멍과 그 구멍 주변에 조개들이 파놓은 모래 더미들이 뭉쳐있고, 우뭇가사리 같은 해초류도 떠다닌다. 그리고 모래사장 군데군데 박혀 있는 산호초 바위들. 돌 표면의 물결치는 듯한 문양은 바로 이 돌이 산호초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산호초들이 닳아져 만들어진 빈탄 해변의 모래는 백색에 부드럽기 그지없다.


매우 조심을 하고 자외선 차단제를 온 몸에 발랐지만 한 낮의 적도를 비추는 태양은 나의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었다. 해변과 수영장에서 밖으로 내밀고 있던 어깨가 화상을 입어 열이 나고 계속 후끈거렸다. 나는 수영장 파라솔 아래에서 하루 종일 썬탠을 하고 있는 영국 아가씨가 어떻게 그 뜨거운 태양의 화상을 견뎌내고 있는지가 참으로 궁금했다.



빈탄 섬 투어에 나서다


다음날 오후 시간에는 한낮의 자외선을 피해 빈탐 섬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파사 올레 올레(Pasar Oleh Oleh)에서 캄풍(Kampung) 에코투어(Eco Tour) 티켓을 사고 조금 기다리니 승합차 1대가 왔다. 프랑스인 가족이 차의 중간에 타고, 우리 세 식구는 차 뒤의 세 좌석에 나누어 앉았다.


조용하고 한적한 섬 빈탄에서 대단한 투어 내용이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상적인 몇 가지 장면이 우리 가족의 호기심을 세우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Sumatra) 섬에서 전해진 전통춤으로서 발리의 바롱 댄스와는 조금 다른 춤이다.


점심 식사를 하러 들어간 공연장 무대에 아주머니 무희 2명이 나와서 이 전통춤을 정말 여유 있게 춘다. 아주머니들은 서로 이야기까지 나누면서 한가하게 춤을 추고 있는데, 아내가 밭 메다 온 아주머니들 같다며 한참 동안 웃는다. 같이 동행한 11살 프랑스 소녀가 기다란 다리를 움찔거리며 그 아주머니들과 정답게 춤을 추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몸무게가 100kg은 가볍게 넘어 보이는 여행 동료, 프랑스 아저씨는 나와 함께 그 소녀의 춤 동작을 보며 한참을 함께 웃었다.


샌들을 신고 숄더백을 멘 빈탄의 안내인이 우리 두 가족을 인솔하고 간 다음 방문지는 고무나무 농장이다. 이 외진 섬에도 고무나무를 재배하여 고무를 내다 파는 산업이 뿌리 깊게 내리고 있었고, 모든 고무 제품은 중국으로 수출된다고 하였다. 마당에서 닭에게 모이를 주던 할머니가 나와서 고무나무에 칼을 긋고 고무 진액을 플라스틱 통에 담는 시범을 보여준다. 다들 고무나무를 칼로 긋는 체험을 하면서 서로 훌륭한 일꾼이라고 놀려댔다.


칼과 농기구를 만드는 인도네시아 대장간을 둘러보고, 우리 가족은 숙소로 돌아오는 빈탄리조트 승합차에 다시 올라탔다. 날씨는 가끔 더위를 느낄 정도이고, 차 안에 들어왔을 때 느끼는 에어컨 바람이 너무 시원하다. 길가의 주변 나무는 야자수 같은 열대 나무들이지만 왠지 차량도 많지 않은 2차선 도로가 강원도의 산길 같이 친근하다. 생각보다 빈탄 섬은 꽤 넓어서, 적도 아래 열대 밀림을 한참이나 달린 후 다시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빈탄의 보름달


해는 조금씩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나의 가족은 다시 한가하게 수영을 즐겼다. 빈탄의 밤이 저물어가면서 우리는 해변의 파라솔 아래에 몸을 누였다. 아내와 딸은 한 파라솔 아래 딱 달라붙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해변의 하늘 위에는 달무리가 감싼 보름달이 우리의 머리를 비추고, 밤의 조명에 빛나는 야자수는 우리 가족을 엄호하듯이 길다란 가지를 한껏 치켜세우고 있다. 해변의 바위 위에 놓인 목재 다리의 조명이 마치 꿈속의 모습 같이 흔들리고 있다.


해변의 보름달 아래 파도가 계속 철썩거리고, 밤이 깊어갈수록 파도 소리는 더욱 크게 귀 속을 파고든다. 딸 녀석은 점점 더 커지는 파도소리가 무섭다며 엄살이다. 나는 다시 살며시 눈을 감아봤다. 이 시간을 멈출 수는 없을까?


여행 내내 이 빈탄의 보름달 비추는 환한 밤을 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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