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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이름: 이수아 ㅣ 작성일 : 2006-08-31 오후 7:19:08

나름 긴 시간이었다.
 로마, 피렌체, 베니스, 밀라노를 거쳐 스위스의 취리히와 루체른, 오스트리아 짤쯔부르크와 빈 그리고 프라하와 뮌헨을 지나 방콕을 마지막으로 한 27일간의 여행 - 뜨거운 태양과 지겹도록 내리는 비, 스쳐지나온 역들과 기차의 흔들림, 공기 속을 떠돌던달큼하고 투명하던 자유의 기운을 짧은 언어로 표현한다는 건 애시 당초 무리한 일이다. 다만 그 곳에서 내가 행복했었다는 것만은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 그 첫 번째- One day in Firenze >


꿈을 꾸게 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저 그런 통속적인 사랑 얘기, “냉정과 열정사이”를 처음 책으로 보았을 땐 조금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던 두 작가에게 살짝 실망하던 순간이었다. 하지만눈으로 본다는 건, 귀로 느낀다는 건 또 다른 세계였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마주보고 섰던 분수대 앞 좁은 골목사이로 둥실 떠오르던 쿠폴라를 본 순간, 나는 언젠가 하고 피렌체를 생각하게 되었다.

 8시에 문을 연다. 연한 초록과 붉은 색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Santa Maria del Fiore 의 쿠폴라는 성당이 문을 열기 2시간 전부터 사람들을 기다린다. 아침시간은 아직은 고즈넉하고 좁은 나선형 계단을 오를 때 뒤따르는 사람도 마주 내려오는 사람도 없어 좋다. 스테인드글라스마다 황금 빛 햇살이 넘실거리고 텅 빈 회랑 어디선가 울리는 노랫소리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좁은 입구를 지나 꼭대기에 발을 디디면 붉은 지붕이 어디까지나 넘실거리는 꿈처럼 아름다운 피렌체를 볼 수 있다.

 “피렌체 두오모는 연인들의 성지’라고 말하던 아오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적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 인간에게 있어 사랑이란 영원한 화두겠지만 이렇게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사랑을 말하는 장소는 참으로 드물고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먼 곳에 오면 역설적이게도 두고 온 곳의 모든 것이 맑은 유리관을 통과하는 것처럼 명료해지는 순간이 있다. 내내 부대끼며 마음아파하고 사소한 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한 것이 사실은 나의 사랑이 모자란 탓이었음을 만난 적 없으나 이 자리에 온 다른 사람들을 통해 깨닫는다. 몸 전체를 감싸는 행복감이 마주보이는 조토의 종탑만큼이나 날아오른다.

 성당을 지나 편하지는 않으나 정겨운 돌길을 조금만 걸어가면 시뇨리아 광장이 나오고 베키오 궁전이 있다. 생각보다 크지는 않지만 연한 갈색이 아름다운 건물이다. 피렌체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메디치가의 국부 코지모는 한 때 정치적인 이유로 이 궁전의 높은 탑에 갇힌 적이 있었다. 책 속에 묘사되어있던 피렌체의 중세 풍경과 코지모의 도시의 대한 애정이 꽤나 인상 깊어 몇 백 년 전의 그 광경 속을 내가 걷는 듯 느낌이 참 묘했다.유한한 인생과 권력의 의미와 예술의 무한성을 잘 알았던 그들이라서 역사는 호의적인 미소를 보내는가 보다.

 르네상스 미술의 보고인 궁전 바로 옆의 우피치 미술관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보티첼리의 ‘봄’과 ‘비너스의 탄생’을 오래도록 눈이 아프도록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것을 볼 줄 아는 눈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오래도록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니 잘 산다는 건 생각보다 별로 어려운 건 아닌 게 같다. 돈이나 명예 같은 것에서 조금만 눈을 돌려
하늘을 보고 음악을 듣고 풀숲을 거닐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웃을 수 있다면 하는 희망을 품어본다. 피렌체의 공기 속에는 사람을 순화시키고 정신을 고양시키는 그 무엇이 섞여 있음에 틀림없다.

‘냉정과 열정사이’의 여주인공 아오이는 보석상에서 일을 했다. 뒤에서 보면 아주 작고 초라한 집들이 위태하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이지만 앞에서 보면 화려한 베키오 다리의 보석상 쇼윈도에서 사람들은 눈을 떼지 못한다. 예쁘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다. 베키오 다리가 바라다 보이는 또 다른 다리의 난간에 걸터앉아 함께 간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오래 전에 잊어버린 줄 알았던 지나간 시절의 노래 한 자락, 함께 했던 사람들과 사건들, 추억은 살아가는 데 힘이 되는 것 같다. 베키오 다리 쪽에선 아련하게 노래가 들리는데 아르노 강으로 해는 기울고 저녁 안개에 싸여 강을 담뿍 물들이는 석양은 피렌체의 영광을 회상하게 했다. 잊지 못할 밤이었다.

 < 그 두 번째 - The taste of Venice >


사람의 감각은 묘한 구석이 있다.
 어디선가 먹어본 그 맛이라던가, 향기로 장소를, 사람을 기억해내게 한다. 바티칸 성벽 맞은편의 작은 아이스크림집의 레몬 맛 젤라또의 새콤함은 입에 침을 고이게 만들고 줄곧 마셔대던 에스프레소는 생각만으로도 정신이 번쩍 들게 하며 까를로비바리의 얇은 계피 맛의 크레페는 지금도 향기가 풍기는 듯하다.

산타루치아역을 빠져나오는 순간 맞딱뜨리게 되는 수많은 기둥과 다리, 반짝이는 물결, 값비싼 곤돌라를 전세내지 않고 버스에 해당하는 ‘바포레토’만 타고 바라보아도 척박한 조건에서도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한 인간의 의지 때문에 베니스는 충분히 아름답다.

나는 요즘 피자를 보면 베니스와 한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너무 좁은 골목길이 빼곡이 들어차 지도가 제 기능을 못해 필요 없는 곳이 베니스에서 길을 찾는 건 요즘말로 죽음이다.
리알토 다리나 산마르코광장 같이 유명한 곳은 눈을 들어 벽을 보면 웬만큼은 해결이 되지만
산타마그리타 광장을 찾아가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꼭 가야하는 이유는 단지 한 조각에 1.8유로하는 피자 때문이었다. 여러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모두 곤란한 표정에 ‘다리를 건너서 다시 물어라’는 식의 막연한 단답식의 대답뿐, 심지어 한 신사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복잡해.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 " 라고..

한참을 헤매다 드디어 구세주를 만났다. 작은 키에 조금은 완고해 보이는 할아버지, 처음엔 좀 무서운 인상이었는데 연세에 비해서 영어도 잘하시고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시다. 선뜻 데려다 주시겠다고 해서 가깝거니 하고 염치불구하고 따라나섰더니 웬걸
골목을 돌고 돌아도 광장은 나오지 않고 작열하는 이탈리아 태양아래를 15분 이상을 계속 걸어만 가셨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땀을 뻘뻘 흘리는 그 모습에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계속 좋은 여행이 되길 바란다.” 며 할아버지께서는 웃으시며 온 길을 되짚어 가셨다.

손바닥만한 광장의 피자가게는 생각보다 작고 초라했고 한 조각이 얼굴을 덮을 만큼 큰 피자에 달랑 햄만 얹어져 있었지만 화덕에서 막 구워 검댕이 약간 묻은 따끈하고 담백한 맛은 어느 유명한 피자가게의 보다 맛이 있었다. 요즘 광고에도 나오지 않는가 ,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1분’ -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게 해준 할아버지 덕분에 그 날의 피자는 최고로 기억되리라.

< 그리고 세 번째, My first opera, "carmen" >


세상엔 참 소원을 이루어 주는 장소가 많다. 베드로 성인의 오른쪽 발도, 트레비 분수도, 프라하 까를교 네포묵 동상앞 부조에, 줄리엣의 가슴까지 모두 동전이 넘치고 사람들의 손길로 그 부분만 반질반질 윤이 났다. 나도 빠지지 않고 빌었으니 어쩔 수 없이 귀가 얇은 인간이고 게다가 날씨가 좋게 해달라고 빌었더니 거짓말처럼 비가 개었으니 영 효험이 없는 것 같지는 않다.

베로나엔 실제로 줄리엣의 집과 무덤, 로미오의 집이 있다. 그 낭만적인 도시에서는 여름이 되면 천 년 전에 지어진 원형극장(아레나)에서 오페라 공연을 한다. 뮤지컬이나 연극은 더러 보았지만 본격적인 오페라는 처음이라 살짝 걱정이 앞섰지만 두 번 다시 할 수없는 경험이라 생각하고 비제의 카르멘의 표를 샀다. 35000원정도의 가격, 우리나라와 비교해 결코 비싸지 않았다.

 자리는 말 그대로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돌바닥, 방석을 깔아도 딱딱하다. 공연시간이 다 되자 징소리와 함께 불이 꺼지고 여기저기서 촛불이 반짝거린다. 작은 도시라 네온사인도 없는 깜깜한 공간에 둥실 떠오르는 불빛이 얼마나 낭만적인지 한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4막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무대, 명곡 “하바네라”의 선율이 밤하늘에 울리고 별은 빛나고 사람들은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공연을 감상하고 있었다. 가족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온 사람들 사이에서 초등학생정도의 어린 아이들도 신사, 숙녀처럼 감상하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다. 어릴 때부터 충분히 문화적인 교육을 받고 ,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커가는 그들의 모습이 조금은 부러웠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와인이 유명하다고 해서 한 병 샀던 것을 가지고 가 막 중간의 휴식시간이 되면 바람을 맞으며 마셨다. 좋은 사람들과 공연을 보면서 함께 마시는 와인, 여행 중의 최고의 사치였다.

9시에 시작한 공연은 1시가 다 되어 마무리가 되고 숙소까지의 길을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신이 나서 걸었다. 유스호스텔의 침대에 누워 옷을 입은 채로 잠들만큼 피곤했지만 참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 날 하루의 모든 것들은.

 < 그 네 번째 - 블라티슬라바를 아시나요? >


이번 여행을 가기 전까지 나는 이 도시의 존재를 몰랐다. 슬로바키아의 수도 ,작고 오래된 도시 블라타슬라바.

 빈 남 역 에선 하루에 10번쯤 이 도시로 기차가 오고간다. 1시간쯤 걸리는 여행길엔 온통 해바라기가 피어있고 숲이 우거지는가 싶더니 다시 황량한 벌판이 펼쳐진다. 동유럽이라는 선입견 탓인가, 지금까지 거쳐 온 어느 도시와도 그 첫 느낌은 달랐다. 소란하고 복잡한 역은 살벌한 느낌에 여행안내소 잎에 어디까지 늘어진 줄이 피곤함을 느끼게 했다. 우리 돈으로 100원정도 하는 커피 자판기의 카페모카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마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지도 이 도시에서 온몸으로 실감했다. 영어로 된 표지판도 흔한 여행지도도 없는 도시에서 인터넷에서 프린트한 흐릿한 종이를 보여주며 “castle” 이라도 열심히 물었지만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 마침내 그 단어를 아는 사람이 나타났을 땐 열심히 설명하는 그 사람의 말을 내가 한마디로 못 알아듣는다. 슬로바키아어니까. 그런데 신기한일은 어느 순간 우리들이 의사소통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각자 자기 나라 언어로 말하면서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 그 사람의 가르쳐 주고자 하는 진심이 나한테 통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블라타슬라바 성은 소박하고 뭔가 수리를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초라하지 않고 깨끗하고 기품이 있었다. 자기들이 가진 것을 최선을 다해 보여주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 나라에는 너무 많이 개발된 도시의 교만 같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성에서 내려다 본 다뉴브강의 모습은 흐린 날씨 탓인지 쓸쓸해 보였다.

그리 넓지 않은 구시가 곳곳엔 우스꽝스러운 동상들을 찾을 수 있다. 하수구에서 막 기어나오는 듯한 노동자의 상반신, 골목 옆에 숨은 파파라치의 모습, 공중에서 재주를 피우는 동상들을 순간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생활 속에 배어있는 일종의 유머랄까, 여유가 느껴졌다. 결코 우리나라보다 부유하지 않고 물가도 놀랄 만큼 싼 나라지만 정신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행복한 구석이 있는 게 아닐까 여겨지는 거리풍경이었다. 혹시나 삶에 조금 짜증이 난다면 그냥 한가로이 않아있어도 한없이 마음이 편해지고 풍요로와 지는 경험을 하고 싶다면 가보라고 권하고 싶은 곳, 그 곳이 블라타슬라바였다.



 여행을 간다. 짐을 싸고 비행기를 타고 낯선 방에 누웠을 때 피로감에, 더러는 외로움에 ‘내가 왜 여기 왔을까’ 아주 짧게 후회하는 순간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한 여행이 끝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지도를 펼쳐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중독성이 강한 것이다.

 숲 안에서는 나무는 몰라도 그 숲 전체를 보지는 못한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그 안에서 보이는 하늘이 우주의 전부인줄 알고 산다. 하지만 그 곳을 한 발자국만 벗어나면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여행은 그래서 가는 것 같다. 자신이 사는 곳에서 미처 다 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안 그래야지 스스로 반성하고 멋진 삶을 사는 모습에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다짐도 하며 오랫동안 잊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기억해내며 다시 열심히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여유가 생긴다고 해야 할까, 한 박자 쉬어갈 수 있는 용기도 생기고 평소에 사소하다고 여겼던 작은 것들이 오히려 더 기억에 오래 남는 경험을 통해 작은 것의 아름다움도 배울 수가 있다. 여행지에서 보게 되는 멋진 풍경이나 맛있는 음식, 잊을 수 없는 공연들은 일종의 보너스인 셈이다. 인생이 너무 무겁고 내 자신의 가벼움에 지겨움을 느낄 때쯤이면 아마 다시 여행을 갈 것 같다. 보다 좋은 모습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 내가 생각하는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nicetree@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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