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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길고 무더웠던 금년 여름, 지리산의 추억
이름: 임행근 ㅣ 작성일 : 2006-10-25 오전 11:26:19


일본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지금도 앞으로도 그 기록을 깨기 어려운 ‘남자는 괴로워’라는 14부작인가 그 이상의 연작영화가 있다.
하루 세끼 또박또박 어김없이 찾아오는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家長으로서
 겪는 애환을 그린 영화인데 그만큼 가장의 책임과 의무는 때로는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온다.
남자라면 살면서 겪는 온갖 수치와 굴욕을 참을때도 있으며 가족을 위해서라면
 자존심도 팽개치고 돈몇푼 벌려고 원하지 않는 비굴함과 아부철학도 깨우쳐야
 현대사회를 무난하게 살아가는 자라 할수 있겠다.


8월중순의 금요일밤, 회사를 퇴근후 곧바로 배낭을 꾸려 지리산행 심야버스가 있는
 사당역에 도착해보니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아직도 열대야가 후덥지게 느껴지는 밤에 어두침침한 버스로 한 가장이 속세의
 무거운 짐을 벗어놓는 대신 자기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30kg는 족히 넘음직한 배낭을 짊어진채 버스속으로 향하고 있다.
 그는 지금 자기자신과 좀더 대화를 나누고 자신을 더욱 사랑하기 위하여(자신을 사랑할줄 알아야 자기처럼 남들도 사랑하고 아끼고 배려할수 있으므로) 홀로 떠나고
 있다.
그동안 한번도 홀로는 시도해보지 않았던, 어쩌면 혼자가는게 두렵기도 하고
(뱀등 여러 신체적인 위험한 상황발생가능등) 자신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를
 며칠이 걸리는 지리산종주를 시작코저 한다.
새로운 각오를 갖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이 어쩐지 외로워보이기도 하고 비장감마져 느껴진다.

꽉 들어찬 45인승버스의 좁은 좌석에서 오금이 저리는걸 느끼며 중간휴게소도 건너뛴채 억지로 선잠을 청했다.
 버스는 낯선 사람들로 수면제가루를 공중에 살포한듯 전원취침,
간간이 코고는 소리만 은은하게 들린다.
 대략 네시간정도 지났을까.
지리산중턱의 성삼재는 어둠속에서 주차하려는 버스들의 엔진소리와 웅성웅성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저벅저벅 한시간정도 랜턴등반을 하니 여명이 밝아오고 광활한 전망의 노고단에
 다다른다.
백두대간의 발원지인 이곳 지리산의 중턱에서 김밥한줄,라면으로 이른 아침을 먹고
등산화끈을 꽉 조여맨다.
---나의 왼발, 오른발, 손, 어깨, 나름대로 빈틈없이 준비한, 만일의 비박까지


준비한 배낭---모두에게 잘 부탁한다.
 스님들은 며칠전 하안거(夏安居)를 마치고 속세로 나왔다는데
나는 이제 속세를 등지고 잠시나마 심신단련차 25Km가 넘는 능선산행을 시작하련다.

노고단-첩첩산중 연봉(連峰)을 거쳐-돼지봉-임걸령-노루목에서 잠시 낯선 등반객들과
오이한입 베어물며 숨을 돌린다.
 오는 동안 내내 지리산의 늦여름은 온통 야생화의 천국이다.
수수한 빛깔의 튀지 않는 수북한 하얀꽃,노란꽃,주홍꽃들-그리고 보랏빛 금강초롱등
화장기가 전혀 없는 생얼굴의 은은히 향기나는 여인들이다.
지리산의 웅장함에 부드러움을 더한 멋진 조화이다. 게다가 여느 산에서는
 볼 수 없는 주목,구상나무,가문비나무,고사목등이 산안개,운해(雲海)와 잘 어우러져 단연 이 땅에서 최고의 명산으로 꼽기를 나는 주저않겠다.

설악산의 각지고 날카로운 소나무예봉들은 멋지고 아름답지만
 이곳 지리산에는 하늘높이 삐죽삐죽 솟아난 길고 날씬한 봉우리들은 찾아볼래야 찾아볼수 없다.
멀리서 보면 지리산의 봉우리들은 낮은 둔덕의 형상을 가진, 늙으신 어머니의
 옆으로 납작하게 퍼진 포근한 젓가슴이다.
그 아련한 가슴의 추억은 얼마나 따스하고 포근한가.
 아마 나는 그 가슴을 평생동안 목마른 듯 그리워하리라.
아니 어쩌면 지리산은 피아골등 여기저기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죽어간 수만명의
국군,경찰,인민군 그리고 빨치산(partisan)들의 민족적 비극의 젓무덤이다.

설악산에는 이러한 절절한 한(恨)이 없다. 경치좋고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지리산주변은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우리의 토속적인 지명들-구례군,하동군,산청군 그리고 반대편으로 마주한 함양군,마천면,산내면,주천면 고기리등-이 모든 지역에
 걸쳐있는 지리산을 나는 최소 1년에 한번씩은 남은 여생동안 즐기리라.

삼도봉을 지나고 화개재에서 좌측으로 뱀사골계곡 팻말이 나온다.
뱀사골과는 다음에 오기로 약속하고 지나쳐
귀여운 토끼봉을 지나 처녀가 즐겨찾는다는 총각샘에서 물한모금 마시며
 한참을 쉬었다.
정상으로 계속 이어지는 능선길은 물이 귀해 샘터에서는 무조건 쉬며 물을 보충해야 한다.
다시 고생보따리를 등에 올리니 다리가 휘청거린다.
 -여덟시간정도 걸어왔나. 잠도 버스안에서 시원치않게 자고 이건 완전 짐꾼산행이군-
 조금 더 가서 명선봉이 보이는 연하천산장에 이르러서야 식성좋은 나의 위장과 대장들이 꿈틀거리며 아우성을 친다. 그네들을 곯게 해서는 안된다.
후다닥 햇반두개와 참치를 끓여 고추장범벅으로 양반김 한 장씩 살짝 올려
 늦은 점심을 먹으니 이 녀석들의 공간이 채워지자 조용해져 식후연초로 달랬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오후 세시쯤의 비빔밥이었다.-
 배부르니 포만감에 낮잠한번 자기전에 지난주에 같은 코스를 답사한
 보석사업을 하는 동창친구에게 여기까지 무거운 짐 끌고온것도 스스로 대견한양
 우쭐해서 전화를 걸었다.
‘행근아, 두시간만 더가면 벽소령대피소가 있으니 거기가서 자!
빨리 어두워지기전에 일찍가서 쉬도록 해.‘
힘들고 수고한다는 위로의 말이라도 들으렸더니
연하천산장에서 자면 종주일정에 차질이 생긴단다.
 종주 첫날-새벽부터 거의 10시간을 걸었더니 다리도 욱씬거리며 무게를 감당하기
 힘든 배낭끈사이로 수건을 끼웠는데도 양어깨가 계속 쓸리면서 화끈거리며 쓰라립다.
더 쉬고 싶지만 유경험자인 친구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 친구는 험난한 인생바닥을 쳐보았을뿐 아니라(그의 진지한 구리빛 얼굴만 봐도
 대충은 짐작할수 있다. 지나온 삶의 여정을---) 무역쟁이인 나보다도 해외뒷골목까지의 경험이 풍부한 그야말로 여느 보석장사치와는 차원이 다른 진흙속에 묻힌 진주다.
늦으막에 그를 만난건 행운이며 그 친구가 없으면 인생이 얼마나 단조롭고 무미건조할까.
마음을 다잡고 배낭 을 다시 꾸려 심호흡과 기합을 넣으며 일어선 순간,
무릎도가니가 시큰하며 후들거린다.
양쪽 엄지발가락옆에 새끼발가락밑에 물집이 잡힌 것 같다.
 발바닥이 뻐근하여 억지로 무거운 발을 끌다시피 스틱에 의존하여 보폭을 좁혔다.
지리산의 본격적인 경치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산죽소로(山竹小路)로 벽소령가는 도중에 절벽에 낀 푸른 이끼,
 드문드문 고사목,구상나무,잣나무들은 서울근교산들의 수종(樹種)들과는 차원과 품격이 틀리다.
 산죽들이 발걸음을 옮길때마다 나의 무릎과 정강이를 휘리릭 소리내며 간지른다.
부드러운 산죽과 절경이 맺힌 근육을 풀어준다.
두시간남짓 더 걸으니 오후6:30, 드디어 오늘밤 숙소가 될 그림같이 멋진 스위스풍의
산장이 나타난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역시 친구말 들어서 손해보는 경우는 없어. 친구중에도 자산과 부채가 되는 친구가 있는데 그는 역시 나의 자산이자 보이지 않는 자본이야.-
살면서 칭찬과 인정을 아끼면 안된다.
특히 내일모레 50줄에 접어드는 우리들은 집에서나 일터에서 쉰소리나 채찍을
 함부로 휘두르면 안된다.
 삼사십대에나 채찍과 당근요법을 적절히 구사해야 씨알이 먹히는 법이다.

벽소령주변에 친 여기저기 비박텐트들과 땅바닥의 여러 색깔의 침낭들---
모든 것이 무질서한 듯 보이나 산장과 봉우리들과 잘 어울어진 한폭의 그림이다.
굳이 몽마르트르의 화가가 아니라도 그냥 연필스케치라도 그리고 싶은 정경이다.
 7시쯤에 산장에서 안내방송이 나온다.
산장예약을 안한 사람중에 65세이상 먼저 접수하란다. 아예 없다.
 ‘60세이상 나오세요’ 해도 거의 없다. 사실 그 연세에 종주는 확실히 무리이리라.
50세이상은 열명남짓 나왔을까.
40세이상으로 낮추니 나는 맨앞에서 안정권으로 숙소배정을 받았다.
나이들어 처음으로 공공시설에서 대접받으니 기분좋았다.
 비나 이슬을 피할수있게 됐으니.
 -괜히 비박준비하느라 고생보따리만 늘렸군. 그래도 유비무환이니---

목동에서 초등학생아들과 함께 왔다는 친구와 통성명후 저녁을 함께 먹고
 가져온 맥클란위스키를 오징어와 함께 벤치에서 함께 마셨다.
벽소령은 정말 별천지다. 깊고 높고 넓은 밤하늘에 박혀있는 수많은 별들은
유난히 반짝거리며 서울의 분위기좋은 카페가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순수자연이다.
‘한잔 또 한잔을 마셔도 취하는건 마찬가지지---별빛만 흘러내리네’
내가 절로 노래가 나오자 그 친구가 더하라고 한다.
‘가사를 앞과 끝밖에 몰라 거기까지---’했더니 웃는다. 사실 그 친구도
 그 노랠 좋아한다고 해서 나이를 물었더니 돼지띠, 한살 아래란다.
 그러니 쌍칠년도 노래에 동감할수밖에---
오고가는 술잔속에 그가 타인이라는 생각이 안들었다.
 유행가가사처럼 산다는게 뭐 다 그렇고 그런게지 뭐.
 11시쯤 됐을까.
담요두장을 대여해서 바닥에 누우니 밀물처럼 잠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우리집 천장벽지의 연두색 야광별대신 창문너머의 진짜별을 보며 낭만적으로 자니
지금쯤 거실에서 열대야에 시끄러운 에어콘틀고 잘 마눌생각에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일요일, 아침7:00까지 이리저리 뒹굴뒹굴 게으름피우며 푹 잤다.
벽소령까지 왔으니 오늘, 내일은 하루 대여섯시간정도씩만 걸으면 된다.
샘터에 가서 30분이상 기다려 물긷고 오니 목동친구가 아침같이 먹자며 온갖 밑반찬을 꺼내놓는다.
아이를 볼모로 데려왔으니 마누라가 오죽 준비 잘해줬으랴.
장조림에 밴뎅이젓, 깻잎, 고추장짱아치등- 워메 이게 웬 산해(山海)진미여!
나는 남보다 좀 위가 큰 것 같다. 떠나기전 슈퍼갔을때 마누라도 내가 햇반
 작은것을 고르니까 큰걸로 가져가라(당신 많이 먹잖아!)는걸 괜히 마다해서
 후회하고 있다.
 -마누라도 때론 보탬이 될 때가 있다.-

식사후 대충 휴지로 설거지를 한후(물이 귀해 설거지할수가 없으며 쓰레기도
 갖고가야 한다.)
목동에서 온 아버지와 아들은 먼저 출발한다.
부자지간 대화를 많이 나누라며 씩 웃어주었다.
 나는 산길걸으며 절대고독을 누릴테니---

촛대봉을 바라보며 덕평봉-영선봉을 지나 느릿느릿 황소걸음으로 주변산세 바라보며
세시간정도 걸으니 넓디넓은 목장같은 세석평전이 나온다.
젓소대신 온갖 야생초와 들꽃들로 산장과 어울린 한폭의 서양화다.
산안개가 섞인 은은한 바람이 가슴이 탁트이게 하며 여간 시원한게 아니다.
점심으로 다시 햇반과 참치, 그리고 봉지김치를 먹었다.
 같은 메뉴이지만 장소와 시간에 따라 맛이 약간씩 틀리다. 입에서 녹는건 마찬가지.
밀려오는 고단한 여행자의 오수를 참지못해 약수터밑 졸졸흐르는 물에 고양이세수와 발만 딲고 나무밑 그늘아래 한시간정도 잠을 청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인기척으로 깨어보니 몸이 가뿐해졌을뿐 아니라
이제 종주도 중반을 넘기며 익숙해졌다. 지형지물에 신체도 적응이 되었을뿐 아니라
마음도 느긋해져 이제는 서서히, 철저히 남은 일정을 즐기면 된다.
 배낭을 조여매고 비탈산길로 다시 접어들었다.
이상하게도 오후 세시경의 내리쬐는 햇볕이 살갗에 뜨겁게 와닿지 않는다.
원래 지대가 높아 기온이 낮은가보다.
세석에서 두시간남짓 걸었을까-오늘의 숙소인 장터목에 이르렀다.
장터목은 전라도,경상도에서 천왕봉일출보러 올라온 사람들과 서울사람들로 장터처럼
복작거린다.
목동친구와 아들을 다시 만나 반가웠다.
오후7시경 갑자기 장터목까지 운해가 몰려오며 소나기가 한바탕 뿌린다.
비닐을 뒤집어쓴 사람들이 오고가며 부산해진다.
 산장예약을 한 사람들이 많아 간신히 숙소계단옆 자리를
40세이상이라는 자격으로 다시 배정받았다.
나이먹는다는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이런곳에서 대접받을줄이야 꿈에도 생각못했다.
비는 어느정도 그쳤으나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분다.
검은 비구름이 심통을 부려 남은 양주를 목동친구와 재빨리 비우고 10시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자리가 부족했던지 숙소자리를 배정못받은 아주머니들이 남자숙소에 빈자리를
 기웃거린다. 산에서 예쁜 처자를 발견하기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다.
옆에 빈자리라도 있으면 알선하겠건만 이미 내옆구리를 3명이나
들러붙어 코를 골며 동년배들이 자고 있다.

 장터목산장은 타지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로,
 장돌벵이들처럼 그렇게 잠들어가고 있었다.

다음날, 종주 마지막날---
새벽4,5시쯤 되었나보다---
천왕봉 일출보러 간다며 사람들이 바지런하게 침소를 정리하며
부시럭거리는 동안 어렴풋 잠을 깨었을뿐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삼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만 천왕봉일출을 볼수있다는데
어차피 나는 자격도 없거니와 매일 떠오르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동네야산에만 올라가도 볼수있는 일출에는 애시당초 관심없었다.
매년1월1일 정동진 해돋이행사에 아귀다툼으로 가려는 극성스러운 사람들을
 평소 못마땅해온 터이다. 예전에 정동진에 가서 최민수오뎅, 모래시계소나무등
철저히 장사속으로 변질된 그곳을 보고 실망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7시쯤 일어나니 여기저기 널부러진 담요를 보고
절반이 훨씬 넘게 사람들이 일출보러 천왕봉으로 향한걸 알수있었다.
입이 텁텁하여 양치질만 하고 나도 정상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배낭은 숙소앞에 그냥 놓아두고 빈몸으로 물통하나,
 스틱하나 갖고 천왕봉으로 가는 길은 새털,깃털처럼 날아갈듯 여유롭다.
초입에서 정상갔다 내려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눈에는 내가 오히려
게으르고 뭘 모르는 놈으로 비칠지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나는 지리산종주의 백미인 천왕봉을 향하여
발을 굴러야 한다. 아쉬움이 밀려와 천천히 걸어가며 흠씬 젖은
나무들과 풀과 이슬이 송글송글 맺힌 야생화를 바라본다.
선회하는 수많은 잠자리들이 날개를 말리느라 수없이 바위에 붙어있고
윙윙거리는 야생벌들이 너무 많아 쏘일까봐 피해간다.
길은 하나요, 산죽소로 양옆은 어젯밤의 비로 인하여 더욱 청정무구,
그 자체였다.
침엽수 나무들로부터 뿜어져나오는 휘튼치드향은 진하게 나의 폐부를
순환시키며 손가락마디끝 실핏줄까지 산소를 운반하는듯 느껴진다.
맑은 하늘과 그 경계를 이루는 산봉우리들---
지리산의 온갖 수목과 꽃들은 수수하게 아름다워 봉숭아물들인 누이의
가냘픈 손가락처럼 너무나 소박해서 서글퍼 보이기조차 하다.
 정상에 오르니 건너편봉우리로 거대한 운해가 넘지를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다.
아무런 생각없이 한참을 바위 그루터기에 앉아있었다.
산봉우리들 사이의 공간과 깊이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깊다.
아무리 사진을 찍어도 자연의 심오함은 부분적으로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수많은 원혼들이 담겨져 있어서일까.
 지리산은 알수없는 정령(精靈)이 느껴지는것 같다.

 이제 내려가야 한다. 하산해서 환속해야 한다.
 다시 외로워지겠지만 나름대로 보람이 있는 가장의 역할도 의미가 있다.
지리산종주로부터 배운 무언의 교훈---나의 삶에 충실해자!
연습이나 반복되지 않는 인생무대에 어느 누군들 고단하지 않으랴.
내가 고민하고 괴로워할 때 산천초목들은 제자리에서 붙박아
뻐기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고 최선을 다할 뿐이다.
계절의 변화에 사물의 내부에서는 엄청난 변혁이 일어나고 있으리라.
 매년 나는 이곳에 와서 이들과 함께 나의 다짐과 각오를 새로이 하리라.

천왕봉 하산길은 날개말린 잠자리처럼 사뿐 가벼웠다.
한시간도 채 안걸려 장터목에 다시 도착해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미 산장을 떠났고 남은 사람들도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샘터에 내려가 물받으러 기다리면서 줄선 사람들에게 일출보고 왔냐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아침먹고 중산리계곡으로 하산한다고 낯선 이들에게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먼저 꺼냈다.
 지리산으로 인해 마음이 넉넉해져서 일까. 아니면 지리산을 떠나는게
 아쉬워서였을까.
그랬더니 포이동에서 왔다는 키가 큰, 한 친구가 자기도 아침먹고 중산리로 가서
텐트철수후 서울로 간단다.
앞에 서있던 60대로 보이는 어르신도 중산리로 내려가 대구의 집으로 가야 한단다.
뜻밖의 동행을 2명이나 만나 함께 샘터밑에서 남은 반찬 모두를 꺼내
마지막 영양식, 햄도 구워먹고 담소를 나누며 한가로이 장수비결(?), 식후연초를
 즐겼다.

30분정도 내려갔을까.
중산리계곡이 시작된다. 계곡경치는 여느 계곡과 다를바 없었다.
특이하다면 석수쟁이들이 반가워할 엄청 큰 바윗돌들이 여기저기 지천으로 널렸다.
등줄기에 땀이 흥건해질 무렵 키큰 친구가 계곡목욕을 하자며 먼저 팬티만 입고
가슴치에 오는 계곡물에 머리깊이 잠수한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나도 합류, 어르신도 냉탕입수---모두 아이들이 되었다.
 어르신의 실제나이는 70대초반으로 비뇨기과병원을 했던 의사였으며
비슷하게 보였던, 광고대행업을 한다는 키큰 친구의 나이를 물어보니 나보다
 네 살어려 아우님으로 호칭, 그도 덩달아 나를 형님으로 불렀다.
 지리산동생과 70대초로의 어르신---전혀 어울릴 것같지 않은 어색한 관계가
 지리산이 맺어준 인연으로 친근하게 다가온다.
70대초로의 어르신은 인생경륜으로부터 얻은 삶의 지혜를 우리에게 몇가지
 가르쳐주시기도 하며 나처럼 등산예찬론자이시다.
골프도 10여년 넘게 쳐봤지만 어르신은 돈쓰면서 대접못받고 뒷사람 신경쓰이며
공이 잘 안맞을땐 스트레스받는다며 결국 등산으로 귀착, 지금의 건강한 몸을
유지,단련하고 계신단다. 마나님은 뚱뚱해서 집에 계신단다.
 그리고 고혈압,당뇨,고지혈증 등등은 등산과는 천적---바로 우리 두사람이
 증인이라며 확인시켜 주신다.
 만병통치약이자 십전대보탕보다 좋은 등산을 아직도 안하는 친구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키큰 친구가 그러는데 제천에 아는 약초캐는 형님이 알려주기를
심마니나 약초꾼들이 계곡浴을 즐기는 이유가 계곡물은 여자의 음기여서
몸의 정기(精氣)에 그렇게 좋단다.
 물이 많은 여자는 몸의 호르몬분비가 왕성, 그만큼 신진대사가 원활하여 건강하다는
증거이다.
 아닌게 아니라 계곡목욕을 하산하며 세 번을 했더니(3일동안 능선에는 물이 없어
 한번도 목욕을 못했으니---) 시큰시큰했던 무릎과 알통박인 정강이가 씻은 듯
 사라졌다.
 확실히 효험이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일시적인 기분일까.
중산리휴양림에 다 내려와 아우님의 텐트를 걷는 동안 풀벌레들에게 쏘였는지
여기저기 다리가 모기물린 듯 20여군데가 톡톡 따끔따끔하고 가려웠다.
여름철 장기산행시 반바지가 시원하고 좋지만 튀어나온 나뭇가지, 돌에 긁히고,
 까지기도 하고 벌레들의 공격대상이 되는 점이 문제였다.

네시간남짓 하산후 진주(원지)가는 표를 끊은후 늦은 점심으로
 산채비빔밥,동동주,도토리묵등으로 포식을 한후 불콰해진 얼굴을 지참하고
 버스에 올랐다.
우리는 원지에서 내릴때 잠시나마 하산동행시 정들었던
어르신에게 공손하게 ‘건강하십시요’ 인사를 드렸다.
 대구오면 연락하라며 대구의 명산, 팔공산행을 함께 하자신다.
식당주인이 전화예약해준 원지-서울간 우등고속을 끊으니 한시간정도 남아
산청면사무소앞에서 맥주한잔 하며 버스를 기다렸다.

삶이란 기다림의 연속---그리고 선택,결정---그리고 다시 기다림.

3시간반걸려 남부터미날도착, 아우님과 연락처를 주고받은 다음,
제천에 안다는 형님과 함께 가을약초를 함께 캐러가자며 약속했다.

정확히 나흘만에 지리산출발때 같은시간대 밤11:00,
 사바세계에 환속하였더니 아직도 열대야는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그동안 에어콘과 선풍기끼고 살았던 마눌은 얼굴이 부어보인다.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그날 밤, 천장에는 벽소령의 총총별들과 천왕봉의 운해, 봉우리들,
지리산 야생화, 산죽, 고사목과 나무들, 잠자리, 벌, 세석평야, 장터목산장등이
 소용돌이처럼 떠돌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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