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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 내지 환상은 모조리 깨어졌다.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누비는 아오자이 여인을 상상했던 내게 그들은 아오자이를 벗어 던지고 오토바이로 갈아탄 신선한 풍경을 전해줬으며, 사회주의 국가의 딱딱한 이미지를 그렸던 내게 그들은 세계의 이목을 끄는 상업도시의 활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영화에서 보았듯, 계속된 전쟁으로 온 도시가 황폐해진 베트남 중부지역에 대한 기억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곳에는 시간의 흐름이 비켜간 듯한 한적함과 평화로움이 여행자를 매료시킨다.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넋을 간직한 역사도시 후에(Hue), 빛바랜 옛 사진 속에서나 봤음 직한 순수함이 흐르는 호이안(Hoian), 그리고 하얀 모래사장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 속에 고대 참파(Champa) 왕국의 유적을 간직한 나트랑(Nha Trang)까지. 시간을 거슬러, 시간의 흐름이 멈춘 그곳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내 발걸음도 멈췄다. 베트남의 역사를 간직한 고도(古都) 하노이에서 비행기로 1시간, 호치민에서 1시간 30분 거리의 베트남 중부에 있는 후에는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Nguyen Dynasty)의 수도였던 곳이다. 도시 곳곳에 역대 황제의 왕릉과 사원이 자리하고 거대한 궁전이 서 있는, 우리의 경주 같은 곳이라고 할까? 또한 1세기 동안 베트남을 지배했던 프랑스 식민통치가 시작된 곳이 바로 후에이며 베트남전 당시 격전지였던 탓에 많은 유적이 파괴된 상처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에게 후에는 베트남의 긴 역사를 만날 수 있는, 반드시 가봐야 할 곳으로 꼽힌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적으로 지정된 후에에는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가 흐른다. 도심을 가르는 흐엉 강(Song Huong)을 중심으로 구시가와 신시가로 나뉘는데 구시가에는 누각 위에 거대한 베트남 국기가 펄럭이는 왕궁(Dai Noi)이 자리한다. 두터운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거대한 공간은 초대 황제 때인 1804년에 짓기 시작해 1833년에 완성했으며 1945년 2차 대전 종식과 함께 식민 통치의 허수아비였던 바오 다이(Bao Dai) 왕이 퇴위하기 전까지 13대에 걸친 응우옌 왕조 황제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황제, 여기에 잠들다 후에 근교에는 역대 황제들이 잠든 7개의 왕릉과 왕조와 연관된 사원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유적의 대부분이 흐엉 강을 따라 자리하고 있어 유람선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유람선은 세련되진 않았지만 강을 오가며 생활하는 이곳 사람들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역사의 무대로 떠나는 길에 운치를

더한다. 첫 번째로 유람선이 멈춘 곳은 후에 시내에서 서쪽으로 4킬로미터 거리의 티엔 무 사원(Chua Thien Mu)이다. 1601년에 세워진, 후에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층마다 불상을 모신 21미터 높이의 팔각형 7층 탑이 우뚝 서 있고 안쪽에 청동불상을 모신 사원이 자리한다. 이곳에서 특히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사원 뒤뜰에 서 있는 하늘색의 오스틴 자동차. 1963년 11월, 베트남 전쟁과 독재정권의 불교탄압에 항거하여 소신공양 한 틱 쾅 둑(Thich Quan Duc) 스님이 당시 타고 갔던 자동차다. 유람선은 계속해서 황제릉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곳의 묘는 우리처럼 봉분 형태가 아니라 마치 사원 같은 하나의 건축물을 이루고 있는데, 왕이 생전에 직접 설계해 왕릉에 반영된 황제들의 인생관이나 성품을 엿볼 수 있다. 여러 황제의 왕릉 중 가볼만한 곳은 뜨 득(Tu Duc)과 카이 딘(Khai Dinh), 민 망(Minh Mang) 황제의 능으로 제일 먼저 들른 뜨 득 황제릉은 연못과 누각, 목조 정자가 어우러진 고요한 풍경이 인상적인 곳. 응우옌 왕조의 4대 왕으로, 후사를 돌볼 자식이 없던 그는 정치보다는 사색을 즐기며 시를 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자연과 건축물이 탁월한 조화를 이룬 그의 묘는 어쩐지 애잔한 감동을 전한다. 12번째 왕이었던 카이 딘 황제릉은 1920년부터 사후 6년이 지난 1931년까지 12년 동안 지어진 축조물로 프랑스 건축의 영향을 받아 색다른 매력이 흐르는 곳이다. 왕릉을 수호하는

코끼리와 말, 신하의 조각상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보이는 건물이 묘 내부인데, 자기와 유리를 이용해 문양을 짜맞춘 벽화가 화려한 빛깔을 뽐내며 예술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두 번째 왕이자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민 망 황제릉에서는 위엄이 느껴진다. 후에의 황제릉 중 가장 큰 규모로, 입구를 지나면 역시 코끼리와 신하 조각상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으며 호수와 다리, 정원, 사원 등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28헥타르의 공간에 펼쳐진다. 이렇듯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왕의 묘를 짓지만(왕의 묘를 짓는 기간에는 세금을 평소보다 많이 걷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실제로 왕은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왕의 시신을 보호하기 위함으로, 그래서 왕을 묻은 자는 즉시 처형을 당했다고 하니 왕의 강력한 권위와 동시에 사후의 평가를 두려워한,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인간임을 보여주는, 나약함이 느껴진다.

비현실적인, 그래서 아름다운 후에에서 호이안으로 가는 길은 세계 8대 비경 중 하나인 하이 반 고개(Deo Hai Van)를 넘어가는 여정이다. 하이 반의 ‘하이’는 하늘을, ‘반’은 구름을 뜻하는 말로 해발 500미터의, 난간 하나 없는 꼬불꼬불한 길을 달리는 아찔한 시간을 견뎌야 하는데, 커브를 돌 때마다 아기자기한 어촌 마을의 모습이, 푸른 랑코 비치의 풍광이 아찔함에 대한 보상처럼 눈앞에 펼쳐진다.하이 반 언덕을 지나 베트남 최대의 항구도시인 다낭(Da Nang)에서 남동쪽으로 30분쯤 가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옛 모습을 간직한 건물이 양쪽으로 늘어선 작은 마을 호이안이 나온다. 기껏해야 1, 2층 높이의 오래된, 그래서 빛바래고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지기도 한 낡은 건물이지만 그 풍경이 되려 마음에 위안을 준다. 바쁘게 살아온 내 삶에 제동이라도 걸겠다는 듯이, 갑자기 시간이 열 배쯤 느리게 가는 것 같은 느낌도 어쩐지 기분 좋다. 호이안은 참파 왕국 때부터 중국인, 인도인, 네덜란드인 등 서구 상인들과 교역을 한 무역의 요충지로, 16~17세기에는 일본 상인들도 드나들어 일본인들의 거리를 만들기도 한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중국, 일본, 베트남 양식의 가옥과 회관, 박물관 등을 볼 수 있는데, 전쟁의 폭격 속에서도 전혀 훼손되지 않은 덕에 호이안의 옛 거리는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주요 볼거리는 구시가의 중심인 쩐 푸(Tran Phu) 거리를 중심으로 자리한다. 베트남을 오가며 장사를 한 중국 광둥성 사람들을 위한 집회소였던 꾸앙 동 회관(Chau Quang Dong), 중국 교포들의 향후회 장소인 푸 젠 회관(Chua Phuc Kien)은 중국풍의 외관이 눈길을 끌며, 18세기 말에 지어진 건물로 8대째 후손이 여전히 살고 있는 풍 훙 고가(Nha Co Phung Hung)와 1802년 중국인의 후손인 응우옌 왕조의 관리가 선조에게 참배를 올리기 위해 지은 쩐 가(家) 사당(Nha Tho Toc Tran) 등 오래된 목조가옥은 베트남과 중국, 일본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매력을 풍긴다. 1953년 일본 상인들이 강 건너 중국인 거주지와 연결하기 위해 지었다는 내원교(Cau Lai Vien)에서는 일본인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냥 걸어라, 최대한 느리게 호이안의 옛 마을은 도보로 둘러봐도 세 시간이면 충분한 작은 마을이지만 스쳐 지나듯 해서는 진정한 호이안의 매력을 만날 수 없다. 천천히, 산책하는 기분으로 걷는 자만이 정지된 시간이 주는 감동을 누린다.

옛 건물이 들어선 거리이기에 그저 관광용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호치민 사람들의 삶이 반짝이며 오늘을 살아간다. 이름 모를 화가는 베트남 전통모자인 논(Non)을 쓴 아낙의 모습을 화폭에 담느라 여념 없고, 건너편의 기념품 가게에서는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여인이 가게 앞에 의자를 내어놓고 앉아 손님을 기다린다. 동그랗게 모여 앉아 화려한 빛깔의 전등을 만드는 사람들, 조금 전 손님의 주문을 받고 요란한 재봉틀 소리를 내며 옷을 만드는 재단사, 베트남에서도 유명한 손 자수로 수놓은 아기자기한 물품을 판매하는 아주머니 옆에서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장기 두기에 몰두한 아저씨들, 그리고 한쪽 어깨에 가잉(Ghang, 대나무에 바구니를 달아놓은 베트남식 지게)을 메고 거부할 수 없는 해맑은 미소로 여행객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는 할머니까지. 고풍스러운 마을과 썩 잘 어울리는 수수한 그들의 일상이 눈을 통해 마음까지 전해진다.

날이 어두워지면 호이안에는 더욱 은은함이 배어든다. 집집이 전등에 불을 밝힌 거리는 운치를 자아내고 투 본(Thu Bon)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박 당(Bach Dang) 거리에는 강가를 거니는 사람들의 소곤거림이 귀를 간질인다. 어디선가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가보니 그곳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 눈을 가린 채 너덧 발자국 걸어가 막대로 쳐서 호리병을 깨뜨리는 게임이 한창이다. 성공하면 기쁨의 탄성이, 실패하면 안타까운 탄식이 마을에 울린다. 밤거리를 거닐다 맥주 한 캔을 사들고 강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나룻배에 올랐다. 뱃삯을 놓고 한참 승강이를 벌이다 뱃삯을 깎는 대신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소원을 이뤄준다는 작은 초를 받았다. 30여 분 남짓, 배 위에 촛불을 밝힌 채 강의 낭만을 만끽하는 동안 어느덧 촛불도 꺼지고 세월의 흐름을 비켜 간 호이안도 깊은 잠에 빠진다. 그리고 아쉬움을 뒤로 하고 숙소에 돌아오니, 리조트 앞에 펼쳐진 소박한 정취의 해변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깊은 곳에 남아 있던 도심의 마지막 찌꺼기까지 말끔히 씻어낸다.

참파 왕국의 영광을 찾아서 베트남의 옛 영화를 찾아 떠난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는 나트랑이다. 다낭에서 비행기로 1시간, 베트남 중남부에 자리한 나트랑은 오늘날 백사장과 야자수가 어우러진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원래 이곳은 8세기경 1,300년 동안 베트남 중남부 지방을 지배해온 참파 왕국의 수도이자 아시아 해상 무역의 요충지로 번영을 누렸던 곳이다.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포 나가르 탑(Thap Po Nagar)으로, 9세기에 세워진 참파 왕국의 사원이자 현존하는 참파 유적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 높이 13미터의 흙기둥 유적지는 생각보다 많이 훼손된 상태다. 원래는 8개의 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4개만 남아 있으며 힌두교 사원으로 지어졌지만 현재는 불교사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훼손되긴 했지만 참파의 세심한 건축솜씨를 엿보기에는 무리가 없다. 특히 붉은 벽돌탑이 어떻게 1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굳건하게 서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라고. 지금도 이곳은 나트랑 주민들에게 종교지로서 큰 의미를 지닌 곳으로, 신발을 벗고 참탑 내부에 들어가 진지하게 절을 올리는 이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참탑이 자리한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드넓은 바다와 수많은어선이 정박해 있는 나트랑 어촌마을의 한적한 모습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