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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을 만나다, 유랑하다, 탐닉하다

이름: 관리자 ㅣ 작성일 : 2009-06-08 오후 6:46:48

Japan Streets in Tokyo

Walk So Slowly

골목길을 만나다, 유랑하다, 탐닉하다

단 1초만 한눈을 팔아도 일행을 놓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도쿄 도심 한복판, 오거리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틈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미아가 될 판이었다. 역설적이지만, 도쿄의 구석구석에 자리한 골목길의 다양한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건, 복잡하기 그지없던 시부야의 그 오거리 덕분이었다.

글 주소영 기자｜사진 박진희 기자

첫 번째 이유는 그랬다. 골목길을 거니는 재미는 조용한 시골마을보다는 현대적인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대도시에서 진가를 발휘하게 마련이니까. 아마도 골목길이 전해주는 포근하면서 한가로운 풍경이 도심의 북적임과 대비를 이루며 한없는 여유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단순한 비교 효과만으로 며칠씩 도쿄의 골목길 탐방에 탐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거리 하나하나가 지닌 특색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

神田古書店

책을 뒤덮은 뽀얀 먼지가 주는 아련한 정취 까만 뿔테 안경을 쓰고 독서 삼매경에 빠진 주인아저씨, 책장 가득 꽂혀 있는 색바랜 누런 책, 그리고 그곳에서 풍기는 쾨쾨한 곰팡내…. 헌책방에서는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헌책으로 빼곡한, 비좁은 공간에서 뿜어내는 정취를 마주하다 보면 아련함 내지는 가슴 뭉클함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도쿄에서 만난 간다(神田) 고서점가 거리가 (온통 일어로 쓰여 있어 단 한 줄도 읽을 수 없었음에도) 유난히 반가웠던 건 오랜만에 헌책방이 주는 이런 애틋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하철 진보쵸(神保町) 역 일대에 자리한 간다 고서점가 거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서점 거리다. 진보쵸 역 A1 출구로 나오면 바로 오른쪽으로 헌책을 판매하는 서점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부터 야스쿠니도리(靖國通り)와 하쿠산도리(白山通り)를 중심으로 반경 5백여 미터 거리에 1881년에 문을 연 산세이도(三省堂), 문고판 독서 붐을 일으킨 출판사 이와나미(岩波) 북센터 등 160여 개의 고서점이 즐비하다. 간다 지역이 오늘날 이 같은 고서점 거리로 알려지게 된 것은 1백여 년 전 메이지(明治) 시대에 도쿄 대학을 비롯한 여러 사립학교가 이 지역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일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이제 막 서점 문을 열고 차곡차곡 바깥에 책을 진열하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사람 한두 명 지나갈 공간을 두고 헌책으로 빼곡한 책방 내부에는 주인조차 몇 권의 책이 있는지 모를 정도. 야구치 쇼텐(矢口書店)의 주인은 대략 1만 권 정도가 있을 거라고 얘기하지만, 고개를 갸우뚱 하는 것이 그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야구치 쇼텐은 1918년에 문을 연 서점으로, 주로 시나리오나 포스터, 잡지 등 영화와 연극, 드라마에 관련된 책과 자료를 취급한다. 야구치 쇼텐에서 야스쿠니도리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만나는 간다고쇼 센터(神田古書センタ一)는 9층 건물의 빌딩으로, 교육, 철학, 아동, 스포츠, 만화, 문학, 의학 등 층별로 주제에 따라 전문 서점이 들어서 있다. 그 중 나카노 쇼텐(中野書店)은 만화책과 문학관련 고서적을 취급하는 서점으로, 2층에는 만화책이, 3층에는 소설과 수필 등 문학 도서가 진열되어 있는데, 한 권 한 권 얇은 하얀 종이로 싸여 있는 책을 보고 있자니 주인이 얼마나 정성스레 헌책을 손질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서점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묘미는 바로 구하기 어려운 책을 만나는 데 있다. 혹시나 하고 물었는데,

이곳에서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초판을 만날 수 있을 줄이야! 유리관 속에 보관된 이 책은 1906년에 출간된 것으로, 3권 세트의 상태가 꽤 양호해 높은 가치를 지닌다. 가격은 315만 엔. 오래된 잡지만을 전문적으로 파는 서점에는 당시에는 하이틴 스타였을 이름 모를 누군가의 앳된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고, 오래된 여행잡지를 판매하는 곳도 있다. 소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잡지는 트렌드에 민감해 시간이 지나면 버려두게 마련인지라 몇 십 년이 지난 여행잡지를 보는 이유가 궁금해 물으니, 가고자 하는 여행지의 옛 모습과 현재를 비교해 볼 수 있어 여행을 떠나기 전 늘 이곳에 들러 옛 잡지를 들춰 본다는 대답이 다.

단순히 헌책방이 많다는 것 외에 간다 고서점가 거리가 특별한 이유는 각각의 서점이 특정한 전문분야를 다루고 있기 때문. 외국 서적만을 취급하는 곳, 사진집, 잡지, 예술 서적만을 취급하는 곳 등 어마어마한 책의 양만큼이나 서점의 종류 또한 다양하므로 이곳에 갈 계획이라면 서점의 위치와 취급분야를 정리해 놓은 지도를 반드시 챙기자. 간다 고서점가 거리의 아무 서점에나 들어가면 지도를 구할 수 있다.

谷中

소박한 도쿄의 뒷골목을 정처 없이 걷다 이곳에 가보지 않았다면 기자에게 도쿄는 복잡하기만 한 곳으로 기억됐을 게 분명하다. 현대적인 초고층 빌딩이 서 있는 화려한 도시,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혼잡함은 도쿄를 대표하는 이미지임이 분명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 혼잡함 속에서 겨우 몇 발자국만 벗어나면 소박하기 그지없는 평화로운 서민 동네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으니 말이다.

시타마치(下町). 옛 일본의 모습을 간직한 서민 동네를 지칭하는 말이다. 도쿄의 북쪽, 지하철 닛포리(日幕里) 역 부근의 야나카(谷中) 역시 도쿄에 남아 있는 시타마치의 하나로, 이곳에는 목조가옥을 비롯한 70여 개의 절과 신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야나카가 이 같은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1923년 대지진과 2차 세계대전의 폭격을 면한 덕분. 환경에 따라 사람도 변하는지(어쩌면 변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야나카에서는 바삐 움직이는 도심과는 전혀 다른, 과거의 느린 삶을 추구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을 만날 수 있다

야나카의 중심 거리는 닛포리 역 북쪽 출구로 나오면 펼쳐지는 쇼핑거리인 야나카 긴자(谷中銀座)이지만, 그저 가고픈 대로 느리게 걷는 것이 야나카를 만나는 최상의 방법. 물론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도는 파악해야 하므로 가게마다 놓여 있는 지도를 미리 챙기는 것을 잊지 말자.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면 쉽게 눈에 띄는 일본식 전통 목조가옥과 그곳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알록달록한 빛깔의 빨래는 소박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낮은 담 너머로 보이는 유치원의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뛰어놀기에 바쁘고, 마을 입구의 공동묘지와 한집 건너 하나씩 자리한, 죽은 자의 위패가 모셔진 절과 신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동네와 어우러져 음침함 대신 그곳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을 고인의 평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지도에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은 좁디좁은 골목길에서 아기자기한 소품을 파는 가게나 예쁜 인테리어의 카페를 만날 때면 마치 숨겨진 보물을 찾은 듯한 행복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종종 막다른 길에 맞닥뜨리기도 하지만, 그런 게 또 골목길의 매력이니까.

무작정 걷더라도 닛포리 역 서쪽 출구 바로 앞에 자리한 덴노지(天王寺)는 놓치지 말자. 야나카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 고요하면서 평화로운 분위기가 속세에 찌든 마음의 짐을 털어내기에 충분하다.

1864년에 창업한 이세탄츠(いせ辰)는 에도 치요가미(江戶千代紙, 여러가지 무늬를 인쇄한 일본 전통 색종이)를 판매하는 곳. 가게에서는 에도시대부터 전승해온 제조법을 통해 탄생한, 아름다운 문양의 1천5백여 종의 종이를 비롯해 종이로 만든 각종 물건과 일본적인 문양이 들어간 제품을 구입할 수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길을 걷다 출출해지면 기쿠미 센베이(菊見せん-べい)에서 판매하는 쌀과자 센베나 스즈키(すずき)의 고로케로 출출함을 달래보자. 기쿠미 센베이는 1875년부터 5대째 이어오며 센베를 만드는 곳이며, 스즈키는 1968년에 문을 열어 3대째 운영하는 곳으로, 특히 이곳의 멘치까스(メンチカツ, 소고기와 양파를 넣고 돈까스처럼 튀긴 것)는 각종 매스컴에 소개될 만큼 뛰어난 맛을 자랑한다. 이 외에도 15년 전에 문을 연 기모노 가게인 유메이치(夢市), 고양이 장식품으로 가득한 카페 란포(亂步) 등 눈길을 끄는 다양한 공간이 자리하고 있어 온종일 걸어도 지루할 틈이 없다.

高円寺

밥은 굶더라도 쇼핑은 해야 하는 당신에게 엔고(高) 현상으로 일본으로의 여행이 주춤하다지만, 쇼퍼홀릭에게 도쿄는 여전히 매력적인 쇼핑 천국이다. 특히 너도나도 걸친 똑같은 ‘신상’ 제품에 질린 사람이라면 저렴하면서도 개성 있는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빈티지와 구제숍은 최적의 쇼핑 장소. 도쿄에는 다이칸야마(代官山), 지유가오카(自由が丘), 코엔지(高円寺), 하라주쿠(原宿), 시모키타자와(下北澤) 등 빈티지와 중고 제품을 구입하기 좋은 쇼핑 거리가 즐비한데, 그중에서도 코엔지는 타지역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 알뜰 쇼핑족들이 즐겨 찾는 장소다.

다양한 중고숍이 모여 있는 코엔지는 이런 사람에게 권한다. ‘밥은 굶더라도 옷은 예쁘게 입어야 한다.’라고 외치는 쇼핑 마니아, 혹은 ‘지름신’의 강령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뚝심 있는 사람. 이 두 경우가 아님에도 구경 한번 해볼 요량으로 아이쇼핑에 나선다면 십중팔구 양쪽으로 늘어선 중고숍의 유혹에 빠져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마구 카드를 긁어대다가 다음 달에 날아온 청구서를 머리에 둘둘 싸매고 몸져눕게 될 테니 말이다.

코엔지에서 쇼핑을 즐기려면 JR 츄오·쇼부센(JR 中央·總武線)의 코엔지 역으로 가면 된다. 남쪽 출구인 B3번으로 나와 길을 건너면 ‘코엔지 팔 쇼핑 스트리트(Koenji Pal Shopping Street)’라는 간판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코엔지의 중심 쇼핑 거리다. 아케이드로 되어 있는 팔 상점가의 양쪽으로 각종 옷가게가 늘어선 거리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질 뿐 아니라 아케이드가 끝나도 상점이 계속되기 때문에 우선 한 바퀴 둘러보면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점찍어 둔 후에 쇼핑을 하는 것이 좋다.

코엔지의 본격적인 쇼핑거리가 시작되는 팔 쇼유텐가(パル商店街)와 에토와르 도리(エトワ一ル通り)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한 그린 도트(gREEN DOT)는 이름처럼 초록색 페인트칠로 꾸며진 내부가 산뜻함을 풍기는 곳이다. 여성들을 위한 중고숍으로 옷이나 액세서리, 가방, 구두 등 여성 제품만을 판매하는데 이는 모두 미국의 중고숍에서 구입한 것이라고. 바이어가 한 달에 한 번꼴로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물건을 들여오면 세탁 후 직접 뜨개질을 해 원피스의 어깨끈을 달거나 손상된 부분을 손질해 매장에 전시한다. 한눈에 보기에도 세련미를 풍기는 이곳의 제품은 중고라고 해도 가격이 만만찮은 편. 가죽 샌들은 1만 5천~1만 9천 엔 정도, 원피스의 경우 1만 5천 엔 이상이다.

3년 전에 문을 연 소울 박스(SOUL BOX)에서는 미국과 프랑스에서 들여온 옷을 판매하고 있다. 코엔지 주변에는 유독 외국인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에게서 물건을 사들이기도 하고 주인이 직접 외국에 나가 구입하기도 한다. 쇼핑을 하는데 있어 특별한 대화구사능력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곳에서는 영어가 통해 더욱 반갑다. 옷 가게 주인답게 쇼핑에 관심이 많은 주인은 되려 기자에게 명동에 새로 생긴 쇼핑센터를 알려주기도.

이 밖에도 코엔지 쇼핑 거리에는 단돈 1천 엔에 기모노를 구입할 수 있는 기모노 중고숍, 1960,70년대 옷을 취급하는 러버 소울(LOVER SOUL), 어린이 전문 중고가게 등의 옷 가게는 물론 액세서리 숍, 레코드 가게, 중고 서점 등 다양한 중고제품을 취급하는 2백여 개의 상점이 자리하며 아담한 카페와 레스토랑도 있어 쇼핑 중간 중간 휴식을 취하기에 좋다. 제아무리 쇼퍼홀릭이라도 아침 일찍부터 코엔지에 가는 일은 없도록 하자. 코엔지의 상점은 12시에서 1시 사이에 문을 열며 가게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오후 9시경에 문을 닫는다.

築地市場

‘미스터 초밥왕’의 쇼타를 찾아서 새벽 4시 30분. 휴대전화 알람부터 알람 시계, 호텔의 모닝콜까지, 3번의 알람을 듣고서야 겨우 침대에서 일어난다. 잠이 덜 깬 상태로 고양이 세수만 하고 모자를 눌러써 여전히 비몽사몽이지만, 한 손에는 수첩을, 다른 한 손에는 카메라 챙기는 걸 잊지 않는다.

아침형 인간과는 거리가 먼 기자가 이 새벽에 길을 나선 건 츠키지시죠(築地市場)에서 열린다는 참치 경매 현장 때문. 이럴 때 보면 여행의 힘이란 참 대단하다. 만약 내가 도쿄에 살았다면 수산시장의 풍경을 보고자 새벽같이 일어나는 일이 가당키나 했을까? 원래 부지런한 것인지, 아니면 역시 여행의 힘 덕분인지 지하철 츠키지시죠 역에 내리자 시장의 풍경을 보려고 모여든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시장을 향해 바삐 걸어간다.

츠키지시죠 역에서 도보 5분, 츠키지(築地) 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츠키지시죠는 23만 제곱미터의 넓은 부지에 1천여 개의 점포가 들어서 있는 일본 최대의 수산시장이다. 이곳에서 매일같이 거래되는 생선량은 무려 480여 종류의 2천 톤 분량으로 도쿄시민이 먹는 생선의 90퍼센트가 이곳에서 공급된다. ‘츠키지시죠? 낯익은 이름인데….’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면, 그렇다. 바로 ‘미스터 초밥왕’의 쇼타가 초밥에 쓸 신선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 새벽마다 가던 곳이 바로 이곳 츠키지시죠 되시겠다. 도심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이른 시각이건만, 시장 안은 이미 생선을 가득 실은 트럭과 좌판에 펼쳐놓고 판매하는 이들, 생선 운송수단인 타렛에 생선을 잔뜩 얹고 오가는 이들로 북적인다. 가는 길목마다 늘어선 다양한 생선과 활기 넘치는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기 십상인데, 시장에 들어선 후에도 참치 경매장까지 가는 시간이 만만치 않으므로 경매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걸어가야 한다. 참치 경매는 보통 새벽 5시부터 6시 30분 사이에 열리며, 이곳에서 하루에 거래되는 참치는 대략 3천~5천 마리로 이 흥미진진한 장면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로 인해 경매장에는 따로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두고 있다.경매장에 들어서자 바닥에는 하얗게 얼어붙은 수백 마리의 참치가 놓여 있고, 갈고랑이와 플래시를 손에 든 중개인들은 이리저리 참치를 살피면서 참치의 상태를 체크하기에 여념 없다.

잠시 후 ‘딸랑딸랑’하는 종소리와 동시에 경매가 시작되었다. 조금 전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참치의 신선도를 살피던 중개인들은 이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경매사의 외침에 일제히 손가락으로 대답한다. 경매사의 말도, 중개인의 손가락 사인도 도통 알아들을 수 없지만 단 몇 분만에 수십마리의 참치가 동나는 박진감 넘치는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명장면. 낙찰된 참치는 중개인의 점포에서 해체되어 도로, 아카미, 붉은 속살, 뱃살 등 부위별로 나뉘어 진열되는데, 참치보다 더 큰 칼로 참치를 해체하는 과정 또한 흥미롭다.

참치의 해체과정까지 구경했으면 이제 초밥을 맛볼 차례다. 시장 내에는 많은 초밥집이 있지만 가이드북에도, 이곳을 미리 찾았던 이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곳이 다이와 스시(大和司)와 스시 다이( 司大). 아니나다를까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두 가게 앞에는 이미 초밥을 맛보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로 가득하다.새벽부터 줄을 서서 재료가 떨어지면 문을 닫으므로 참치 경매를 보지 않더라도 이곳의 초밥을 맛보고 싶다면 서두를 것. 촘촘한 기름이 입안에 감기는 오도로, 두툼하게 얹어진 성게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우니, 카스텔라처럼 부드러운 다마고 등 그 맛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도저히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니, 도쿄에 간다면 하루정도는 새벽잠을 포기하고 꼭 한번 맛보시길! 츠키지시죠는 장내 시장 외에도 츠키지 역 부근에 도쿄 시민과 관광객들 대상으로 식재료와 조리기구 등을 판매하는 장외시장이 서 있으므로 잠시 들러 구경해 보는 것도 좋다.

新宿思い出橫丁

분위기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도쿄에서의 밤은 바쁘다. 레인보우 브리지와 자유의 여신상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조망을 선사하는 오다이바의 야경을 봐야 하고, 오다기리 조 주연의 영화 ‘도쿄타워’에도,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도쿄타워에 올라 황홀한 도쿄의 밤도 감상해야 한다. 번쩍이는 네온사인이 손짓하는 롯폰기(六本木)와 시부야(澁谷)의 밤거리를 거닐어야 하고, 최고로 잘 나간다는 클럽에서 꿍꽝거리는 음악에 맞춰 신나게 몸을 흔든 후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잔의 맛도 놓칠 수 없다. 그래도, 아무리 바쁘더라도 꼭 하루쯤은 저녁 시간을 비워두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고? 1950년대 선술집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신주쿠의 오모이데 요코초(思い出橫丁)에서의 술 한잔은 제아무리 잘 나가는 클럽보다, 현란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거리보다, 더욱 진한 여행의 추억을 만들어 줄 테니까.

이름 또한 ‘추억의 거리’라는 뜻의 오모이데 요코초는 신주쿠 역 서쪽 출구 뒤편에 자리한다. 신주쿠 역 오다큐(小田急) 백화점을 지나 팔레트 빌딩을 끼고 우회전, 다시 회전초밥집 앞에서 우회전했을 때 꼬치 냄새가 솔솔 피어오르는 좁은 골목길 입구가 눈에 들어온다면 제대로 찾은 것. 입구에 ‘思い出橫丁’라고 쓰인 간판이 걸린 두 개의 골목이 나란히 자리하는데, 원래 둘 중에서 좀 더 넓은 골목은 꼬치 전문 거리인 야키도리 요코초(やきとり橫丁)였지만, 지금은 양쪽 모두 오모이데 요코초라고 불린다.

두 사람이 동시에 지나가기도 어려울 만큼 좁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수십 개의 술집이 양쪽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길, 그 골목길만큼이나 술집 내부도 비좁아 몇 명이나 들어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어쩐지 그 작은 공간에 있으면 끈끈한 무언가가 솔솔 피어날 것만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프라이버시라고는 전혀 지켜지지 않는 좁은 내부는 옆 테이블의 사람들과 쉽게 말문을 트게 했고, 그 결과 지금 앉아 있는 선술집 다이코쿠야(大黑屋)는 3대에 이어 60년째 이 자리에서 영업을 하고 있으며, 오른쪽 테이블의 일행은 이 집의 30년 단골이라는 사실, 그리고 왼쪽 테이블에 앉은 젊은 남자와 아저씨는 부자(父子) 관계로, 오키나와에 사는 아버지가 오늘 1차 사법고시를 본 도쿄대 법대에 재학 중인 아들에게 술 한잔을 사주고자 상경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 역시 우리가 한국에서 온 여행잡지 기자며 도쿄에는 언제 왔고 언제 서울로 가는지, 일본 술은 좋아하는지까지 파악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꽤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거의 제로에 가까운 기자의 일어실력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들과 술을 마시던 아버지는, 마실 땐 모르지만 일어나는 순간 ‘픽’하고 쓰러지는 니혼슈(日本酒)의 위험성을 온몸으로 보여줬고, 주인아주머니는 니혼슈를 마실지 말지를 두고 고민하는 기자의 마음을 눈치 채고는 서비스로 한 잔 내어주시는 센스를 발휘하셨으니 말이다.

나베요리부터 닭요리, 꼬치, 튀김 등 다양한 종류의 안주를 3백 엔부터 2천3백 엔에 판매하고 있어 주머니 가벼운 이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이 거리의 매력. 분위기에 취해 술집에 들어서고, 그곳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과의 한 잔에 취해 나서게 되는 이곳은 술을 좋아한다면 필수코스요, 사람을 좋아한다면 강력한 추천코스다. 술과 사람을 모두 좋아한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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