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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느낌이 진하게 묻어나는 소박하고 정겨운 거리를 걸었다. 혼자 남겨진 그 남자 ‘아라키 노부요시’처럼.

아린 가슴은 거리 위의 담담한 일상에 기대어 위로를 얻는다. 글·안수련 기자 | 사진·문유선 기자

‘아라키 노부요시’라는 사진가를 아시는지? 그는 널려진 쓰레기부터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 오래된 거리의 작은 소품까지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일상을 그려낸다. 때문에 그의 사진에는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과 나른한 편안함이 고여 있다.

한편 몇몇 사진들은 심히 ‘외설적’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처럼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진들이었을 것이다. 한데 특이한 점은 우리가 흔히 ‘일상’이라고 부르는 장면들 사이에 섞여든 ‘외설’적인 사진들마저 지극히 일상적이고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라키 노부요시라는 개인에게 일상이었기 때문인지, 원래 우리가 ‘외설’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본질이 자연스러운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의 몇몇 사진들에 논란의 소지가 있음은 분명한데, 그중에서도 그의 아내 ‘요코’의 나체를 찍은 사진들은 유례없는 혹평을 받았다.

아라키 노부요시는 어느 인터뷰에서 “피사체는 촬영자의 거울로서 상호 연애하는 마음이 됐을 때 좋은 사진이 나온다”는 말을 했었는데, 그 말이 맞다면 그의 아내를 찍은 사진이야말로 아라키 노부요시 최고의 작품일 것이다. 그의 아내 사랑은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별났으니 말이다.

도쿄, 오늘도 맑음 영화 ‘도쿄맑음(Tokyo Biyori)’은 아라키 노부요시와 그의 아내의 사랑을 그린 영화다. 감독 겸 주연을 맡은 다케나카 나오토는 아라키 노부요시와 그의 아내가 함께 월간지 ‘사상의 과학’에 연재하던 포토 에세이를 보고 감동 받아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게 됐다고 한다.

영화는 아라키 노부요시와 요코의 일상을, 그의 사진처럼 담담하게 재연한다. 비 오는 날 함께 조깅을 하다 피아노처럼 생긴 바위에서 신나게 연주를 하거나, 고양이에게 ‘우체부의 사소한 버릇’이 뭔지 묻는, 이 엉뚱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커플에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는 따분함이나 무료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일상은 한없이 소중하며, 사랑스럽다.

아라키는 혼자 남았다, 요코 없는 세상에 영화 속에서 그는 내내 사진을 찍는다. 피곤에 절어 잠든 지하철의 사람들, 길 위에 덩그러니 놓인 소화기, 뒷골목 이발관의 사인, 그리고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고 마는 작고 이름 없는 수많은 일상들을. 그렇게 길 위에서 사진을 찍던 아라키는 어느 날 우연히 혼자 길을 걷고 있는 요코를 보게 된다.

운명 같은 사랑이라도 결국은 혼자다. 실제로 요코는 포토 에세이를 연재하던 중 자궁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다. 아라키는 혼자 남았다. 요코 없는 세상에. 그러나 그는 계속 사진을 찍었고, 그의 시선은 여전히 담담했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모르겠다. 담담한 일상이 있었기에 그의 사진도 그처럼 담담할 수 있었을 게다. 그리고 혼자 남은 그의 시큰한 마음도 그 일상에 기대어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홀로 남겨진 그 남자, 아라키와 같은 마음으로 하루를 살았다면, 똑딱이 카메라 하나 들고 영화 속에서 그가 사진을 찍던 도쿄의 오래된 골목을 걸어보자.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을 지켜온 이들의 일상이 당신에게도 작은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낯선 이에게도 스스럼 없는 거리 닛포리역 남쪽 출구로 나와 왼쪽 계단길을 올라가면 벚나무 가로수길이 있는 시노바즈 지역이 나온다. 거리는 유독 조용하다. 간혹 아침 산책을 하는 지역 주민인 듯한 사람들이 지나갈 뿐이다. 맨들맨들한 묘비 위로 삐쩍 마른 고양이가 봄햇살을 쬔다.

시노바즈 거리는 옛적 그대로다. 이런 길은 이어폰을 꽂고, 스쳐 지나가는 잔상들을 그저 사진 찍듯 두 눈에 담으며 걸어도 좋다. 몇 초간 눈을 감는다고 해서 초고층의 빌딩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의 어느 골목처럼, 돌아서면 전혀 다른 곳인 양 그 모습을 바꾸는 일은 없을 테니. 그리고 흘러가는 풍경들은 언젠가 꿈속에서 본 듯 아련하면서도 친근할 테니까 말이다. 시노바즈의 오래된 거리는 낯선 이에게도 스스럼이 없다.

시노바즈 지역에는 덴노지를 포함해 70여개의 절이 남아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오래된 목조 건물 사이사이에 숨어있다. 다 찾아가보진 못하더라도 지나는 길에 한번 쯤 들르면 찰랑찰랑한 물이 담긴 수조에 몸을 담근 듯 고요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시노바즈의 가게들을 카메라에 담다 최근 시노바즈에는 공방과 아틀리에가 많이 생겼다. 예술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조용하면서도 독특한 공기가 감도는 이 옛 거리에 매력을 느끼면서 하나 둘씩 둥지를 틀기 시작한 것. 가죽 공방과 전통 문양을 새긴 기념품을 파는 숍 등 독특한 가게들을 만나는 것도 시노바즈 산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맞춤 구두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가게 ‘소노미츠(03-3823-7178 www.sonomitsu.com)’는 시노바즈의 수많은 공방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띈다. 5명의 디자이너들이 함께 운영하고 있는 곳으로, 신발을 주문하면 제작하는 데 4개월 정도가 걸린다. 가격은 3만 엔부터. 평소 신발에 돈을 많이 쓰지 않는 기자지만 소노마츠의 신발에 홀딱 반해버린 나머지 ‘평생에 한 켤레 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어 “그럼, 주문 후 배송은 해 주시나요?”라고 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발이 맞는지 알아보려면 꼭 본인이 와서 신어봐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본 전통 문양을 새긴 기념품을 파는 가게인 ‘이세타츠(03-3823-1453)’는 시노바즈의 터줏대감이라 해도 좋을 만큼 오래 전부터 터를 잡아 온 전통있는 가게다. 1864년 ‘간다(神田)’에서 처음 문을 연 이 가게는 지금 6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는데, 에도시대의 작가인 ‘우타가와 히로시게’, 메이지 시대의 작가 ‘교사이 가와나베’, 그리고 비교적 최근의 화가인 ‘유메지 나카하라’ 등 유명 화가들이 그린 그림의 판권을 가지고 있다. 초기에는 나무 프린트를 했었지만 요즘에는 기계식 프린트와 핸드 프린트를 반반씩 혼합해 인쇄한단다. 일본 전통 문양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들려봐야 할 곳. 같은 거리에 두 개의 가게가 있는데, 언덕 위쪽에 있는 가게가 본점이다.

긴 골목 끝 한 모퉁이에 있는 작은 가게에 들렀다. ‘팥빵, 하나에 100엔’. 가격도 소박하고 해서 출출한 배를 달래려 팥빵 하나를 샀다. 커스타드가 든 빵도 하나 주문한다. 영어로 “커스타드 맛 빵도 하나 주세요”하니 가게 주인인 아주머니는 적잖이 당황하신 듯하다. 어쩌겠는가. 어색한 웃음 한 번 씩 흘려줄 수밖에. 한데 조금 후에 아주머니가 슬며시 한국말로 “한국 사람이에요?” 하신다. 이번엔 이쪽에서 놀랐다. 그렇다고 하니 반가워하시며 빵 값을 도로 돌려주신다. ‘받아 두라’, ‘못 받겠다’ 몇 번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내 쪽에서 고집을 꺾고 말았다. 그래서 받아 둔 200엔. 가슴이 찡하다.

빵집 맞은 편 길에는 딱 ‘동네 커피집’처럼 생긴 커피 가게가 있다. 지역별로 들여온 원두를 그 자리에서 볶아 100g 단위로 판매도 하는데, 가격은 100g 당 500엔 선이다. 에스프레소는 150엔, 카페라테는 180엔으로 다른 커피숍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2층에는 편안히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좌석이 있다. 손님들은 대부분 이곳의 단골인지 들어오는 점원들과 정겹게 눈인사를 하고 ‘늘 마시던 커피’를 주문하거나 미리 예약해 놓은 커피 원두를 받아서 총총히 가게를 나선다. 아라키였다면 이 커피숍에서 벌어지는 고소한 일상의 냄새를 절대 놓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하며, 커피를 받아들고 2층으로 올라가기 전 살짝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말 그대로, 소박하고 평범한 길 커피숍을 나와 좁은 골목을 걷는다. 주택가의 작은 담장 위에 녹색의 생생한 화초가 놓인 아기자기한 골목을 지나 조금 큰 길에 접어들었다. 길 위에는 세탁소, 철물점, 이발소, 미용실 등 소박한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인터넷으로 ‘평범한 길’을 주문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박하고 평범한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야나카 긴자’가 있다. 70여 개의 상점이 밀집해 있는 이 시장 거리에는 도너츠와 튀김 등 간식거리를 파는 가게부터 정육점, 식료품점, 과일가게, 서점, 잡화점, 양품점까지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어서 다소 번잡하긴 하지만 천천히 돌아보다보면 소소한 재미가 느껴진다. 야나카 긴자에서 닛포리역쪽으로 난 계단은 ‘유야케 단당(저녁놀 계단)’이라고 불리는 데, 이 계단 옆의 공터는 수십 마리의 길 고양이가 모여 살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시장 골목에서 떨어지는 ‘고물’ 때문이 아닐까 싶었는데, 계단을 올라오는 길에 보니 누군가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시노바즈는 집 없는 길 고양이들에게도 그럭저럭 살만한 곳인가 보다.

우아함이 느껴지는 옛 거리 아자부주반 저녁에는 아자부주반으로 가보자. 최첨단으로 도배된 롯폰기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이 지역에는 아직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과열된 개발의 그물을 살짝 벗어난 듯 고적하고 차분한 아자부주반의 거리에서는 옛 거리의 우아함이 느껴진다.

아자부주반의 입구에는 두 개의 과자점이 있는데, 두 곳 모두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종류별로 깔끔하게 포장된 색색의 과자들은 맛도 일품이다. 때문에 일부러 이곳을 찾아와 과자를 사가는 외국인들도 많다. 길은 격자처럼 반듯하게 나뉘어져 있어 걷기 쉽다. 외진 골목에도 놓치기 아까운 가게들이 많다. 가게 밖에 꽃이 늘어서 있어 꽃가게인 줄 알고 들어가면 세계 각지에서 수입한 허브를 판매하고 있거나 현대적인 벽돌 건물 사이에 전통있는 기모노 가게가 들어서 있다거나 별다른 간판이 없이 ‘영업중’이라고만 표시된 2층의 커피숍이 의외로 취향 좋은 주인이 운영하는 곳이라거나 하는, 거리에 촘촘하게 숨겨진 비밀의 끈을 잘만 잡아당긴다면 그 특별한 가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