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접근성 안내
 
 
 
 
 
아바나, 노스탤지어
이름: 관리자 ㅣ 작성일 : 2008-04-01 오후 3:06:55

아바나, 노스탤지어
아바나에 발을 디디기도 전에, 나는 이미 그 도시에 취해 있었다. 고민 따윈 그 둥근 울림에 마모돼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노스탤지어. 아련한 빛을 발하는 그 단어를 떠올리자 뒷목을 타고 짜릿한 전율이 온 몸으로 퍼졌다.
글 안수련 기자｜사진 문유선 기자｜취재협찬 아에로멕시코 02-754-6336 www.aeromexico.com, 멕시카나항공 02-317-8720 www.mexicana.com,
Leaf Tabacco International
 
 “승객 여러분, 비행기가 곧 착륙할 예정입니다. 현지 시간은 22시 15분입니다.”
디잉, 디잉. 안전띠가 그려진 전등에 주황색 빛이 깜박인다. 호세 마르띠 공항 주변은, 도심에서 불과 20분 떨어져 있을 뿐인데도 2시간 여를 날아 지나온 바다만큼이나 어둡다. 잠시 후, 동체가 천천히 하강 공선을 그리자 그제야 옅은 빛줄기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리타 공항에서 에어로멕시카나에 몸을 싣고 티후아나를 거쳐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후, 다시 멕시카나에어를 타고 깐꾼을 경유해왔으니, 무려 하루 반 가까이 되는 여정 끝에 만나게 된 셈이다.
도시 전체가 휘황한 빛에 싸여있던 멕시코시티에 비하면 민망할 정도로 초라한 풍경이지만, 어쩐지 그 편이 더 아바나답다. 18시간 동안 태양열을 충전해야 전깃불을 쓸 수 있다는 이곳에서 ‘휘황함’이란 말 그대로, 남의 나라 이야기일 것이다.
 
아바나의 밤공기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오니, 마른 사내가 다가와 택시를 타겠느냐 묻는다. 그러마고 답하자 재빨리 짐을 들고 앞장선다. 공항 밖에는 구형 소련제 소형차인 ‘라 다’가 주차돼 있다. 스프링이 다 주저앉았는지 뒷좌석이 심하게 삐걱인다. 엔진 소리가 요란하긴 했지만, 차는 깜깜한 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핸들을 돌려 창문을 여니 싱싱한 흙내가 들이친다. 멜리아 코히바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들숨과 날숨 사이로 나무 탄내와 향긋한 셀러리 냄새, 탈탈거리는 차체에서 흘러나온 기름 냄새가 섞여든 아바나의 밤공기를 양껏 삼켰다.
잠에서 깨면 순식간에 잊혀지고 마는 꿈처럼, 자칫하면 아바나는 제대로 눈을 마주치기도 전에 아스라이 사라져버릴 지도 모른다. 지표가 필요했다. 오래도록 아바나를 기억할 만큼 뚜렷한. 다행히 아바나엔 헤밍웨이란 이정표가 있었다. 1928년에 첫 발을 디딘 이후 1959년 아이다호로 돌아갈 때까지 생의 절반을 아바나에서 보냈으니, 골목어귀마다 그의 흔적이 남아있을 터였다. 헤밍웨이라는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흐릿한 영상 뒤로 꼭꼭 숨겨져 있던 아바나의 문이 활짝 열린다.
 
걸출한 이야기꾼의 아지트
“아바나 위쪽 언덕의 이른 아침에 대해 설명하기란 무척 난감한데 여름의 가장 더운 날에도 그곳의 아침은 늘 서늘하고 상쾌합니다. (……) 당신은 사람들에게 쿠바에 사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 당신이 글을 써 보았던 세상 다른 어떤 곳만큼이나 그곳의 서늘한 이른 아침이 글쓰기에 좋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어니스트 헤밍웨이, 거대한 푸른 강(The Great Blue River)
 
쏴아, 나무를 훑고 지나온 바람 소리가 청량하다. 패스워드 헤밍웨이가 펼쳐 보인 첫 번째 페이지는 헤밍웨이의 집 핑카 비히아(La Vigia)다. 망루(望樓) 농장이란 이름답게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핑카 비히아에선 아바나 도심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특히나 집 왼편에 지어진 4층 건물은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글 쓰는 스타일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거나하게 취해 농담 따먹기를 하며 글을 쓸 수는 없는 법. 수 백 페이지에 이르는 이야기를 물리적으로 써내려가는 데만 적잖은 시간이 들었을 터이다. 헤밍웨이가 연일 펼쳐지는 파티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작품들을 써내려 갈 수 있었던 건, 그만의 비밀공간을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정착하기 전 머물던 호텔 암보스 문도스 511호와 핑카 비히아의 널찍한 거실은 물론, 본채 옆의 이 망루 한 가운데에도 낡은 타이프라이터가 놓여있다. 왁자지껄한 파티의 열기는 건물 사이를 지나는 동안 얼마간 희석되어 홀로 글을 쓰는 그에게 적당한 온기를 전해주었을 것이다.
본채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지만, 너른 창문 너머로 침실과 식당, 거실, 서재, 옷 방, 욕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활짝 열린 문 건너편으로 관광객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챙모자와 사파리 스타일의 옷을 걸치고 흰수염을 기른 노인은 마치 헤밍웨이의 현현인 듯하다. 사실 이곳을 찾은 50대 이상의 서양인들 대부분이 그와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다. 그들 방식의 코스프레라고나 할까.
집안 곳곳에는 생전에 그가 사냥했던 사슴과 물소, 표범의 박제가 남아있다. 은은한 초록빛이 도는 작은 서재에 빽빽하게 꽂혀있는 책들, 잘 손질된 가죽신과 낡은 카키색 군복도 상상력을 자극한다. 욕실의 흰 타일에는 일련의 숫자가 깨알같이 써있다. 의사의 충고에 따라 매일 몸무게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저택을 한바퀴 돌아 왼편으로 이어진 외길을 따라 걸어가면 곧 푸른빛으로 칠해진 수영장이 나온다. 당시 아바나엔 수영장이 딸린 저택이 드문 편이었단다. 호탕한 바다 사나이들과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배우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발산하며 이곳에서 환담을 나누고 때로는 어린애 같은 장난으로 시간을 때웠을 것이다. 술에 잔뜩 취한 남자들은 공작같은 여인들을 번쩍 들어올려 수영장에 빠뜨렸을 지도 모른다. 그 무리 중에서 비교적 점잖은 축에 속하는 누군가는 쏜살같이 뛰어들어 의기양양하게 그녀들을 구해내고 손등에 키스를 바치지 않았을까. 나도 모르게 백일몽을 모락모락 피워내는 건,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야기꾼의 체취가 여전히 강렬하기 때문일 것이다. 수영장 왼편에 나란히 서 있는 네 개의 비석에는 블랙(Black), 네그리타(Negrita), 린파(Linpa), 네론(Neron)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놀라지 마시라. 사람이 아닌 헤밍웨이가 길렀던 애완동물의 이름들이니. 그 너머로 한참 보수 중인 보트야 말로 그의 작품 곳곳에 흔적을 남겼을, 보이지 않는 주인공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낚시광이었던 헤밍웨이는 일등 항해사였던 쿠바인 친구 그레고리오 푸엔테스에게 이 배를 선물했는데, 나중에 그가 이 배를 나라에 기증하면서 다시 원래 주인인 헤밍웨이의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 노인의 바다, 코히마르
“노인은 마르고 수척했으며 목 뒤편으로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뺨에는 열대 바다에 비친 햇빛 때문에 생긴 양성 피부종양의 갈색 반점들이 있었다. 그에게 있는 모든 것이 늙었지만 눈만은 예외였다. 바다와 같은 빛깔의 눈은 쾌활했으며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은 듯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술과 친구, 생사를 건 모험을 즐겼던 그에겐 거친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야말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만큼이나 매력적인 곳이었다. 헤밍웨이가 새치 낚시를 즐기던 바닷가의 작은 마을 코히마르에선 거대한 물고기와 사투를 벌였던 산티아고처럼 바닷바람에 그을린 노인들이 로열 팜 트리 아래앉아 오후의 열기를 식히고 있었다. 도리아 양식으로 지어진 원기둥 한 가운데 우뚝 선 헤밍웨이의 흉상은 이곳이 ‘그 노인의 바다’임을 상기시켰다. 하얗게 파도가 부서지는 투명한 바닷가에선 구릿빛으로 보기 좋게 그을린 십대들이 카리브 해안의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물놀이를 즐겼다. 이 평화로운 풍경에서 거친 사나이의 열정이나 목숨을 담보로 한 모험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운데가 뚝 끊긴 녹슨 선착장과 무너져 가는 건물 한편에는 변화의 물결을 타고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던, 그리고 개혁의 바람을 넘어 소리 없이 사라져간 이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1920년 미국이 금주법을 발효하면서 마피아들은 아바나로 몰려왔다. 그들이 지은 카지노와 호텔은 돈 많은 미국인들로 붐볐고, 사탕수수 농장과 담배 농장은 황금거위처럼 외국인 농장주들의 배를 불렸다. 다이퀴리와 쿠바리브레, 모히토가 넘치던 꿈같은 시절이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혁명 이후로 자의반 타의반 타임캡슐에 탑승한 아바나는 미국과 일부 유럽인들에게 여전히 옛 추억이 일렁이는 꿈의 도시다. 방파제 끄트머리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악사들이 옛 노래를 흥얼거리며 미소를 보낸다. 관광객들이 악사들에게 건네는 1달러는 그들의 노래가 아닌, 그리운 시절의 노스탤지어에 바치는 것일 게다.
여기까지 왔다면 라테라사(La Terassa)에서의 점심 식사는 필수다. 가게 안쪽에는 ‘낚시꾼’ 헤밍웨이의 사진이 여러 점 걸려있다. 그 중에는 1959년 새치 낚시대회에 초대된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1992년의 ‘비상시기’ 이후 식량대란을 겪었던 쿠바에서 해산물은 이제 잊혀져 가는 품목이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인데도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맛좋기로 유명한 쿠바산 해산물을 정부가 전량 회수, 수출해 짭짤한 수입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어업협동조합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돼 있지만, 라테라사의 창밖으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아바나, 타임캡슐 속으로
‘타임캡슐 아바나’에서도 보관이 가장 잘 된 곳은 구시가지 지역이다. UNESCO는 1982년 이곳을 세계 유산으로 지정했다. 1590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해 스페인 식민지 풍에서부터 아르데코까지, 다양한 양식으로 건축된 159채의 건물들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잘 조합된 향수의 그것처럼 매혹적이다. 하루하루 내려앉는 낡은 건물들의 재건은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됐다. 그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쿠바에서 이처럼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은퇴한 노년층의 인력을 활용한 덕분이다.
아바나의 시계를 50년 전으로 돌리는 건 낡은 건물들만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 자취를 감추었어야 할 색 바랜 빈티지 자동차들이야 말로 이곳의 풍경을 4~50년대 영화의 한 장면으로 바꿔 놓는 최고의 소품이다. 50년대 이후 쿠바 정부가 자동차 수입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굴러다니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오래된 차들은, 그러나 쌩쌩은 아니더라도 적당한 수준의 품위를 유지하며 ‘달린다’. 그 뒤로 꺼멓게 뿜어져 나오는 매연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지만. 도로를 ‘활주’하는 건 중국에서 들여온 버스들이다. 중국과의 정치적 경제적 교류가 늘어나면서 전기기기나 공공 운송수단에서 중국제품의 비중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대성당에서 알라마르 공원으로 향하는 좁다란 길 왼쪽으로는 젊은 예술가를 위한 문화 센터인 윌프레도 람(Wilfredo Lam) 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중국계 쿠바인인 윌프레도 람은 프랑스 유학시절 큐비즘의 영향을 받았다. 쿠바 고유의 색채가 담겨있는 그의 작품은 뉴욕의 현대 미술관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아바나 구시가지 곳곳에선 오스뗄(Hostel)이란 표지가 부착된 고풍스런 건물들을 만나게 된다. 배낭여행객들의 천국인 유럽이나 미주의 호스텔과 달리, 쿠바에서 ‘오스뗄’은 맨션이나 궁전으로 쓰이던 건물을 개조해 만든 최고급 호텔을 뜻한다. 가격은 5성급 호텔과 맞먹을 정도. 오스뗄은 숙박을 하는 곳일 뿐 아니라 갤러리, 뮤지엄, 카페, 레스토랑이기도 하다. 이 시설들에서 얻어진 수익은 다시 보수공사 비용으로 쓰인다. 많이 벌수록 더 완벽에 가깝게 복원되고 , 그런 호텔은 다시 더 많은 수익을 얻으니, 다소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와는 거리가 느껴지는 ‘부익부 빈익빈’ 모델인 셈이다.
대성당 쪽에 지어진 산미구엘 오스뗄은 16세기에 지어진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인 보수공사를 통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무어리시 스페인 스타일로 지어진 건물 안쪽, 너른 정원 한가운데 연둣빛 앵무새가 뛰뚱대며 좁은 새장 안을 맴돈다. 고색창연한 건물 한 가운데로 쏟아지는 햇살이 철창살 안에 갇힌 현실을 비현실적 아름다움으로 승화하고, 색소폰과 전자 기타, 콩고스 연주자들의 음악은 연민의 부스러기마저 깨끗하게 쓸어간다. 남은 건, 음악이 흐른다는 사실 뿐. 그리고 혀의 돌기에 착 감겨오는 참치기름의 고소함 뿐이다.
헤밍웨이의 흔적을 좇다
하수도 공사가 한창인 작은 골목길이 관광객들로 꽉 막혀있다. 거리 중간에 있는 작은 상점이란 의미의 바 라보테기타 델 메디오로 향하는 ‘순례객’들이다. 아바나 곳곳에 남겨진 헤밍웨이의 아지트 중 하나인 이 건물 안쪽엔 관광객들이 남겨놓은 낙서가 가득 하다.
콜로니얼과 바로크, 아르누보 스타일의 건물들이 넘실대는 구시가지 한가운데, 유리로 덮인 현대적인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개인이 건물을 짓거나 임대를 하는 것이 금지돼 있기 때문에 부동산은 모두 국가에 귀속되어 대부분 사무실이나 아파트로 임대되는데, 이처럼 건물 한가운데 지어진 건물은 살인적인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외국계 합작기업이나 쿠바 주재 외국 기업의 공관으로 사용된단다.
유리창에는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호텔 암보스 문도스(Ambos Mundos)도 비친다. 구시가와 신시가 사이, 두 개의 세계(Both Worlds)를 뜻하는 이 호텔 5층 11호에서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집필했다. 두 번째 아내였던 폴라와 두 아들, 처제가 함께 머물렀던 곳으로, 종종 베란다 너머로 세 번째 부인이 될 제인이 몰래 찾아오기도 했단다.
호텔에 들어서면 탱고와 살사는 자취를 감춘다. 콜로니얼 스타일의 고급스런 로비엔 피아노 소리가 맑게 울린다. 칵테일 한 잔을 시켜놓고 푹신한 소파에 기대 누운 이들은 냉동 보관된 19세기 말 어느 순간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프랑스 영화 ‘라빠르망’에서 모니카 벨루치가 탔던 것 같은 철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오른쪽 복도 끝으로 ‘헤밍웨이의 방’이 나타난다. 금방이라도 헤밍웨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구아바나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커다란 창문을 열어젖히고 구제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릴 것만 같다. 헤밍웨이와 관련된 물건들을 테마별로 전시하는데, 당시엔 투우를 주제로 루이스 도밍귄(Luis Dominguin)이 선물한 투우복과 투우장의 모습이 그려진 시가 케이스, 투우 일기와 책들이 전시돼 있었다.
큰 길로 나오자 관광객을 태운 마차가 경쾌한 발굽소리를 울리며 달리고, 아바나의 명물인 노란색의 코코택시도 지나간다. 한 쿠바 여인이 종이로 꼭꼭 포장한 땅콩을 내민다. “피넛? 1달러!”라며 다가오는 그녀 옆엔 흰색 정장을 차려입은 나이든 노인과 원색의 터번을 두른 여인이 사진기를 들어올리는 관광객에게 손을 내민다. 갑자기 골목이 북적이기 시작하더니 한 무리의 공연자들과 함께 달뜬 공기가 밀려든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지고, 긴 나무다리 위에서 신나게 몸을 흔드는 공연자들은 환한 웃음으로 답례한다.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다. 동전이 짤랑이는 모자를 든 사람에게 ‘성의’를 보여야 하는 것. 구시가지 전역에서 ‘1달러’는 ‘비바 레볼루시온, 비바 카스트로’보다 흔하고 절실한 구호다.
 
외로움을 달래는 다이퀴리 한 잔, 어때요?
“지금 그가 마음을 쓰는 것은 아이들이 여기로 올 것이며 그들이 즐거운 여름을 보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는 일을 다시 시작할 것이었다. 아이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을 그는 일, 그리고 이 섬에서 일군 끝없이 일하는 삶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이제 그는 파리가 그립다면 파리에 가는 대신 그곳을 기억하곤 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만류 속의 섬들(Islands in the Stream)
 
사람 좋아하는 이들이 종종 그렇듯 헤밍웨이는 술을 즐겼다. 그는 네 번 결혼했는데, 늘 결혼 전에 다음 결혼 상대자와 사랑에 빠져 이혼으로 향하는 수순을 밟았다고 한다. 그는 여름이 끝나고 아이들이 어머니에게로 돌아갈 때면 늘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곤 했다. 비록 집필하는 동안에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가 대단한 술꾼이었다는 데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몬세라테와 엘플로리디타는 그가 특히 좋아했던 바앤레스토랑이다. 몬세라테는 벨기에(Belgica) 거리라고도 불리는 거리의 이름이다. 웨스턴 스타일의 미닫이문을 열고 바 안에 들어가니 햇살이 환히 들어오는 바 오른쪽에서 7인의 악단이 공연을 하고 있다. 삭수를 연주하는 피아노의 반주에 클라베스가 딱, 따닥, 박자를 맞추면, 그 사이로 차카, 차카, 착, 마라카스가 흥을 돋우고, 드륵, 드르럭하는 과요 소리가 투박한 질감을 더한다. 럼에 콜라를 섞은 칵테일 쿠바리브레를 한 모금 꿀꺽 삼키고 고개를 까닥이며 외따로 울리는 색소폰 음색에 귀를 기울인다. 리드미컬하게 콩가스를 두드리는 흑인 연주자의 손톱이 유난히 희다.
라플로리다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엘플로리디타는 아르누보 스타일의 고급스런 레스토랑이다. 바에선 뉴욕의 증권 회사 직원처럼 보이는 바텐더가 믹서에 얼음과 럼, 라임에 바나나 리큐어를 넣고 다이퀴리를 만들고 있다. 헤밍웨이가 한자리에서 몇 잔이고 들이켰다던 이 칵테일의 맛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훌륭하다. 의사의 월급이 30CUC인 쿠바의 일반 물가에 비하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은 6CUC란 가격을 지불해야 하긴 하지만. 얼마 전에는 헤밍웨이가 늘 다이퀴리를 마시던 자리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한 팔을 바에 기댄 채 뭔가 짓궂은 장난을 꾸미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아바나 해안에서 독일의 잠수함을 격추시킬 꿈에 부풀어 있는 건 아닐까?
 
헤밍웨이 마리나
헤밍웨이 마리나(Hemingway’s Marina)는 조용한 주택가 같은 느낌이다. 이곳에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진 건, 쿠바가 중남미 여러 국가들과 함께 헬스 프로젝트인 ALBA(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대안)를 진행한 이후 다수의 의학시설들이 들어서면서부터다. 관광객들을 위해 지어졌던 방갈로와 호텔들은 이제 대부분 ALBA 프로젝트 참가자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다. 헤밍웨이 트레일에서 조금 벗어나 있긴 하지만, 소다와 라임, 설탕에 민트와 아바나 럼을 넣은 모히토 한 잔을 시켜놓고 세계 각지에서 온 고급스런 요트들이 떠다니는 풍경을 감상하며 ‘노인과 바다’를 읽는 덴, 헤밍웨이 마리나 만한 곳도 없다.
 
 
 



회사소개이용약관개인정보취급방침광고문의 및 제휴문의채용문의 고객 건의사항 사이트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