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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세기에 건설된 고대도시 테오티와칸과 태양의 전사 아스텍 민족이 세운 제국 테노치티틀란을 거쳐, 독립운동과 근대화 혁명이라는 두 차례의 거센 파도를 넘어온 멕시코시티는 온 몸에 영광의 상처를 지닌 역전의 용사와 같은 도시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는 멕시코시티의 거리를 걷는 멕시코인들의 갈색 피부 아래 남김없이 기록돼 있다.

“1521년 8월 13일 틀라텔로코는 코르테스군에 함락되었다. 그 사건은 승리도 패배도 아니었다. 다만 혼혈 민족, 즉 새로운 멕시코의 탄생을 의미할 뿐이다.” 멕시코시티 북부, 틀라텔로코 시대부터 스페인 점령기와 근대까지, 멕시코의 쓰린 역사가 아로새겨진 3문화광장의 비문에 새겨진 이 글은, 멕시코시티의 정체성을 한 마디로 축약한다. 끊임없는 수난과 약탈, 전쟁과 희생으로 얼룩진 역사를 새로운 탄생으로 여기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멕시코시티의 거주자들이다.

쭉 뻗은 고속도로를 타고 멕시코시티 북쪽으로 50킬로미터 정도 달려가면, 고대 도시 테오티와칸에 닿는다. 멕시코 창조의 신인 케찰코아틀 신전과 태양의 피라미드(Pyramid del Sol), 달의 피라미드(Pyramid de Luna)가 남아있는 이곳은 ‘신들의 도시’라 불린다. 테오티와칸은 7세기 경 알 수 없는 이유로 무너졌는데, 이후 12세기 경 아스텍인들이 이곳을 발견하면서 고위직 인물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멕시코 고대 부족 중 하나인 톨텍족은 고대 테오티와칸과 아스텍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톨텍과 아스텍, 마야 문명은 공통적으로 인신 공양과 희생 제의를 벌였다. 이들의 신화에 따르면 지금까지 4개의 우주가 존재했다. 첫 번째 태양은 재규어에 의해 멸망했고, 두 번째 태양은 바람에 의해, 세 번째 태양은 불에 의해, 네 번째 태양은 물에 의해 멸망했다고 한다. 지금은 다섯 번째 태양이 지배하는 시대다. 아스텍인들은 우주의 멸망을 막고 태양을 지속시키려면 인신 공양이 불가피하다 믿었다. 멕시코 전역에서 발견되는 착물(Chac-Mool)은 고개를 돌린 인간 형상을 한 제단의 일종으로, 제의 시 심장을 바치는 데 사용됐다.

테오티와칸 유적터엔 두 개의 출입구가 있는데, 1번 출입구로 들어가면 케찰코아틀 신전을 지나 ‘죽은 자의 거리’라 불리는 폭 45미터, 길이 4킬로미터의 대로를 거쳐 태양의 피라미드와 달의 피라미드까지 돌아볼 수 있으며, 2번 출입구는 바로 태양의 피라미드로 연결된다.

테오티와칸은 1세기 초에 조성되기 시작했다. 150년경에 완공된 태양의 피라미드는 밑변 225미터, 높이 65미터의 거대한 건축물이다. 태양의 피라미드에 오르려는 사람들의 줄은 피라미드 한 면의 길이를 훌쩍 넘어선다.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10분에 100여명 정도만 순차적으로 올려 보내기 때문이다. 경사가 만만치 않지만 죽을힘을 다해 계단을 오른다. 가파른 경사를 내려다보느니 두 눈 꼭 감고 기어서라도 오르는 편이 낫다. 태양의 피라미드는 여섯 개의 계단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어, 힘들 땐 평평한 언덕에 앉아 잠시 쉬었다 가면 된다. 평원에서 불어오는 쾌적한 바람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뜨거운 이마도 이내 식는다. 피라미드 맨 위층 바닥엔 손톱만한 은이 박혀있는데, 이 은딱지를 만지면 태양의 기운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한 번이라도 손가락을 대보려는 이들의 경쟁이 꽤나 치열하다. 그러니 태양의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전투(?)를 버텨내려면 힘을 비축해두는 것이 좋다.

달의 피라미드 등정은 비교적 쉬운 편이다. 그러나 계단의 높이가 네 살배기 어린아이의 키를 육박해,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다리를 쭉쭉 뻗어 올려야 한다. 죽은 자의 길 끝에 자리한 달의 피라미드는 밑면 120미터, 높이 46미터 규모로, 4층 계단 형식으로 설계되었다. 지금은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첫 번째 층까지밖에 오를 수 없지만, 테오티와칸 유적지를 조망하기엔 충분한 높이다. 태양의 피라미드와 달의 피라미드 사이엔 케찰파팔로틀 궁전과 사제들이 살던 재규어의 정원이 들어서 있다.

테오티와칸 근처에는 멕시코에서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아가베(용설란)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작은 곳이지만, 안내를 부탁하면 한국어를 포함해 수개국어를 할 줄 아는 주인아저씨가 아가베의 쓰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가베는 버릴 것 없는 식물이다. 가시는 바늘로, 얇게 뜯어낸 잎은 종이로, 연한 안쪽 면은 비누로 쓰이고, 한 가운데 뻥 뚫린 곳엔 늘 꿀이 고여 있는데다, 이 꿀물을 걸러 발효시키면 우리의 약주와 비슷한 풀케가 만들어진다. 아가베 박물관엔 멸종 위기에 놓인 멕시코 전통견 솔로이츠퀸틀레(Xoloitzcuintles)도 한 마리 살고 있다.

소칼로는 런던으로 치면 피카딜리 서커스와 같은 곳이다. 소칼로 주변으로는 대통령궁과 대성당, 박물관,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들과 신전터가 자리하고 있다. 물론 지금은 이보다 더 큰 현대식 광장들도 많지만 전통으로 따지면 멕시코시티 최고(最古)로 칠만 하다. 소칼로 광장 북쪽의 돌무더기는 아스텍의 중앙 신전이었던 ‘마요르 신전(Templo Mayor)’ 터다. 1979년 상수도 공사 중, 달의 신 코욜사유키가 새겨진 8톤짜리 석판이 출토되면서 이 신전의 존재가 세간에 알려졌다. 석판 속 코욜사유키는 온 몸이 분리된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는 아스텍 전설 속의 한 사건 때문이다. 대지의 여신 코아틀리쿠에가 아이를 배자 간통을 의심한 자식들이 그녀를 죽이려 했다. 그러자 뱃속에 있던 태양의 신 우이칠로포츠틀리가 튀어나와 형제들을 죽였는데, 후에 누이인 코욜사유키는 달이 되고, 나머지 형제들은 별이 되어 세상을 비추었다고 한다.

오래 전 멕시코시티는 분지 지형의 거대한 호수 안에 위치한 ‘물 속의 도시’였다. 물 한가운데 위치한 이 고대도시에선 치남파(Chinampa)라는 관개수로가 발달했다. 멕시코시티 남부의 소치밀코(Xochimilco)에선 호수 한가운데 건설된 고대 테노치티틀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운하를 흐르는 물은 마치 두꺼운 막에 가린 듯 보이지만 바닥의 진흙이 비쳐서 불투명해 보이는 것일 뿐, 병에 담아 올린 물은 투명하고 깨끗하다. 정부에서 인부들을 고용해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이곳은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뱃삯은 1시간 기준으로 1인당 350페소. 곤돌레로(노 젓는 사람)는 자기 키의 두 배는 돼 보이는 노를 가볍게 저어 배를 움직인다. 형광 주황과 노랑으로 칠해진 화려한 배에 올라 한가로이 물살을 가르며 망중한을 즐기다보면, 어느 샌가 먹거리며 기념품을 잔뜩 실은 배가 다가와 잘 익은 옥수수나 손수 짠 공예품을 건넨다. 까만 머리채를 양갈래로 딴 원주민 여인이 꽃을 건네면, 거절하기가 배는 어렵다.

잠시 후 콧수염을 기른 한 무리의 악단이 다가왔다. 기름을 발라 머리카락을 뒤로 바짝 넘긴 마리아치(Mariachi, 7~10명으로 구성된 악단) 멤버들은 반짝이는 버클과 금빛으로 수놓은 제복을 차려입었다. 꽉 조인 혁대 위로 뱃살이 불룩하지만, 그들은 아랑곳 않는다. 마리아치들은 대개 하체를 꽉 조이고, 상체를 부풀려 맵시를 뽐낸단다. 7명의 멤버들은 저마다 커다란 기타와 색소폰, 바이올린 등 악기를 들고 사랑하는 이를 위한 세레나데를 한 곡조 뽑더니, 이어 ‘메히코 린도(아름다운 멕시코)’를 멋들어지게 연주한다. 박수와 함께 한 곡당 70페소 정도 값을 쳐 팁과 함께 건네니 함박웃음이 돌아온다.

차풀테펙 공원에 위치한 멕시코시티의 국립인류학박물관(Museo Nacional Antropologia)은 여러 모로 인상적이다. 먼저 하나의 기둥이 거대한 지붕을 받치고 있는 설계가 눈에 띈다. 박물관 가운데 우뚝 선 이 기둥은 마야의 우주관에서 따온 ‘생명의 나무’를 상징한다. 첫 전시실엔 베링해를 건너 온 초기 이주민들의 정착상과 문명의 발달 양식이 일목요연하게 설명돼 있다. 이어 메소 아메리카 최초의 문명인 올메카부터 남부의 마야, 서북부의 나우아, 후에 남부로 진출해 나우아를 흡수한 북부의 아스텍 문명까지, 멕시코의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다양한 문명들을 만나게 된다.

제7실의 아스텍 문명 전시실에는 잘 알려진 유물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뱀의 여신인 ‘코아틀리쿠에 석상’이고, 다른 하나는 ‘태양의 돌’이다. 뱀의 머리를 한 코아틀리쿠에 여신은 약 2미터 높이로, 뱀이 수놓인 치마를 입고 있다. 한편 아스텍 달력이라고 알려진 태양의 돌은 무게가 24.5톤에 이르는 거대한 원형 조각으로, 한가운데 태양신 토나티우(Tonatiuh)가 새겨져 있고, 네 개의 우주가 그 주변을 감싸고 있다.

1521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도착했을 때, 멕시코시티에 거주하던 이들은 아스텍 족이었다. 태양과 전쟁의 신인 우이칠로포츠틀리를 숭배하던 이 부족은 “선인장 위에 앉아 뱀을 물고 있는 독수리가 있는 곳에 나라를 세우라.”는 신의 계시에 따라 남하를 거듭하다가 1325년 경 현재의 멕시코시티에 도착해 원주민이었던 톨텍족을 몰아내고, 이곳에 테노치티틀란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이 대제국은 불과 몇 년 사이에 함락됐다. 수 세기에 걸쳐 번영해온 테노치티틀란이 불과 일개 대대 규모에 지나지 않던 스페인 군에게 어이없이 무너진 원인으로, 많은 이들이 아스텍 신화를 거론한다. 아스텍 신화에서 케찰코아틀은 얼굴이 희고 턱수염을 기른 채 거대한 동물을 탄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스페인 정복군을 이끌었던 에르난 코르테스의 모습이 예언에 나오는 케찰코아틀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론 역시 만만치 않다. 케찰코아틀과 닮았다는 이유로 정복자들에게 무너졌다는 설명은 식민주의적 사관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그 당시 아스텍은 인신 공양을 계속하기 위해 주변 부족들을 끊임없이 희생시켰는데, 이에 반발한 부족들이 스페인군 편에 서면서 전세가 불리해졌고, 더불어 오랜 시간 심화된 내부적 부패가 몰락을 재촉했다는 것이 반(反)식민주의 사관을 가진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스페인 군에서부터 번져간 홍역,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도 아스텍이 급속히 무너지는 데 한몫 했다. 흑요석 칼 이상의 무기는 본 적도 없던 아스텍 인들에게, 불을 내뿜는 화승총 역시 커다란 위협이었을 것이다.

스페인군 정복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코르테스의 여자로 알려진 원주민 ‘말린체’다. 나우아어와 마야어를 할 줄 알았던 그녀는 코르테스군의 통역자 역할을 했다. ‘마리나’라는 스페인식 이름으로도 불리는 말린체는 코르테스와의 사이에서 아들 ‘마르틴 코르테스’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멕시코 최초의 메스티소로 알려져 있다. 어떤 이들은 1511년 난파당한 스페인 원정대원 중 한 명인 곤잘로 게레로가 촌장의 딸과 결혼해 낳은 아이 ‘아칸 무안 카불(Ah Kan Muan Kabul)’이 첫 메스티소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스페인 식민지로 전락한 멕시코에서 원주민들이 견뎌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국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노예 수용소로 변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세 유럽의 봉건 영지 제도와 유사한 엔코미엔다(Encomienda) 제도 하에 식민지화가 본격화됐다. 이어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해왔고, 이때부터 기존의 백인과 원주민 혼혈인 메스티소 외에,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 삼보와, 원주민과 흑인 혼혈인 뮬라토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양한 혼혈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계급의 꼭대기층엔 중남미 태생의 스페인인, 크리요가 군림했다. 항간에는 멕시코의 독립운동이 크리요와 스페인 본국 사이의 알력 때문에 발발했다는 견해도 있다.

멕시코는 1821년 독립했지만, 크리요의 꼭두각시였던 메스티소 산타안나의 집권 기간 동안 캘리포니아, 텍사스, 뉴멕시코, 아리조나에 이르는 영토를 미국에 넘겨준다.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간에 벌어진 내전 이후, 첫 원주민 대통령 베니토 후아레즈의 치하에서 안정을 되찾는 듯했던 멕시코는, 다시 1876년부터 30여 년간 이어진 프로피리오 디아스의 독재로 크게 흔들리다가, 멕시코의 국민 영웅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와 프란시스코 마데로(Francisco Madero), 판초 비야(Pancho Villa)가 주축이 된 혁명을 거치면서 근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틀라텔로코는 과우테목(Cuauhtemoc) 왕이 스페인군에 맞서 끝까지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유적 사이로 난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통과하면 산티아고 성당이 나온다. 스페인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기념으로 건축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당을 본 뜬 이 건물은 틀라텔로코 유적을 뜯어 만들었다고 한다. 1968년 10월에는 이곳에서 1만 여명의 시민이 정부의 교육 간섭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 군발포로 인해 다수(멕시코 정부는 극구 부인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1,000여 명 이상이라 추산된다)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처럼 멸망과 폭압으로 덧칠해진 역사를 알게 되면, 무너져 가는 유적 위로 조용히 불어오는 바람마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