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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고도를 달리다

이름: 관리자 ㅣ 작성일 : 2008-08-04 오전 9:57:43

축제, 고도를 달리다

지난 6월, 베트남 중부의 고도 후에(Hue)에서 5번째 아트 페스티벌이 열렸다. 9일에 걸쳐 종횡으로 펼쳐진 각양각색의 이벤트는 후에를 찾은 15만 명의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독려했다. 고성 안에서 폭죽처럼 터진 빛과 소리, 이야기의 향연은 여름 밤 꿈처럼 진하고 아련한 그림자를 남겼다.

글 안수련 기자 | 사진 남경진 프리랜서 | 취재협찬 베트남 항공 02-757-8920 www.vietnamairlines.co.kr

오후 4시. 호치민 국제공항에서 후에로 향하는 베트남항공 VN254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태고의 자연이 펼쳐졌다. 누군가 진흙을 조물조물 빚어 만들어 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짙은 녹색을 띤 나무들이 빽빽한 섬을 지나자 물에 잠긴 세상이 펼쳐졌다. 바다가 강으로, 강은 또 작은 냇물로, 비옥한 땅 위에서 물길은 수천 갈래로 뻗어나갔다.

프롤로그

1시간 후, 후에 공항(Cang Kang Khong Quot Te Phu Bai)에 닿았다. 시내로 가는 길에 늘어선 단층 혹은 복층의 집들은 꽤 낡은 듯했지만 물빛이나 상아색 등 옅은 파스텔 톤으로 칠해져 산뜻해 보였다. 낮은 땅 한 가운데 난 도로 양 옆으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정한 너비로 줄지어 선 가로수가 푸르렀다.

오토바이가 거리를 점령했다는 점에서 후에는 베트남의 다른 도시들과 다르지 않았다. 오토바이에는 때로 5인 가족이 타고 있기도 했다. 여행자들의 조마조마한 마음과 달리, 오토바이는 신호도 없는 길에서 유연하게 방향을 꺾었고, 그보다 훨씬 속력이 느린 자전거도 그 사이에서 유유히 달렸다.

저녁, 축제의 풍경

지난여름 베트남의 고도 후에에서 아트 페스티벌이 열렸다. 2000년 처음 열린 ‘후에 아트 페스티벌(Hue Art Festival)’은 이제 다섯 돌을 맞는다. 이번 축제에는 23개국에서 온 60개 그룹이 참가해 음악과 춤, 기예, 전시, 설치, 거리 공연 등 77가지 색다른 무대를 선보였다.

축제가 열리는 후에 성 입구의 도로는 그야말로 전쟁터다. 두 개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철옹성은 축제의 열기로 뜨거웠다. 30도를 웃도는 후덥지근한 날씨에 매연을 뿜어대며 달리는 오토바이와 빵빵 울려대는 클랙슨 소리가 더해졌지만 좁은 도로에서 오토바이 사이를 날렵하게 피해가는 시클로와 자전거들, 또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건너는 사람들의 기묘한 공존을 바라보느라 불쾌지수가 올라갈 틈이 없었다.

차량 출입이 통제된 후에 성 입구에는 사탕수수를 잘게 자른 주전부리와 칼로 모양을 내 자른 열대과일, 후에 맥주인 후다(Huda)를 늘어놓고 파는 좌판이 섰다. 반대편 잔디밭엔 밤바람을 쐬러 나온 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저만치에 커다란 전광판이 보인다. 잠시 후 열릴 행사를 생중계해 줄 모양이다.

저녁 7시 반. 고성을 배경으로 ‘후에의 아오자이(Le Hoi Ao Dai)’ 패션쇼가 시작됐다. 뜨거운 한낮의 열기를 피해 데이트를 나온 연인들과 어린아이를 안은 부부들, 커다란 카메라를 멘 관광객들. 자리를 꽉 채운 관객들은 연신 부채를 부치며 패션쇼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린다. 낡긴 했지만 옛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고성은 밝은 조명이 비추는 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듯 태연하다. 한 나라의 왕이 살았던 곳이니 이 정도 스포트라이트 쯤이야 익숙할 게다. 잠시 후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장밋빛 아오자이를 두른 모델들이 걸어 나오자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진다.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수십 배로 증폭된, 감미로운 현악기 소리가 장내를 채운다. 이어 광택이 도는 연둣빛, 투박한 황금빛, 한삼모시처럼 얇은 자줏빛 등 색도 모양도 다양한 아오자이를 걸친 여인들이 줄지어 쏟아져 나왔다. 베트남 여성들이야 워낙 날씬하기로 유명하지만, 아오자이를 입고 무대에 선 모델들은 키마저 훤칠하다. 흑단 같은 머리채를 엉덩이까지 기른 모델들은 딱 맞게 재단되어 몸의 굴곡을 제대로 살려주는 실크 아오자이를 펄럭이며 우아하게 걸음을 옮긴다. 트임 사이로 실크 바짓단이 스르륵 스칠 때면 다리 안쪽으로 그 부드러움이 느껴질 것만 같다. 첫 번째 워킹이 끝나고 모델들이 성문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자 연못가에서 흰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이어 ‘피유웅’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밤하늘을 장식했다. 장내 곳곳에서 연신 탄성이 흘러나온다. 베트남의 전통 등과 대나무로 살을 댄 종이우산을 들고 산들바람처럼 가볍게 돌다리를 오가는 여인들의 모습에 행사를 주관하던 경찰들도 잠시 넋을 잃는다.

저녁 시간엔 풍성한 이벤트가 펼쳐진다. 안뜰에 설치된 커다란 장기판 위에선 경기가 한창이다. 군것질거리를 손에 들고 베트남식 보드게임을 하는 모습이 꼭 야시장에 온 것 같다. 축제는 ‘황실 연회의 밤 (Royal Banquet Night)’ 행사에서 절정을 이뤘다. 황실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이 행사는 총 3회에 걸쳐 열린다. 연회는 총 8코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통 복장을 입은 서버들이 진귀한 궁중 음식을 나르는 동안 무대 위에선 응우웬 왕조를 모티브로 한 각종 공연이 펼쳐진다. 연회가 끝날 무렵엔 왕의 행차가 재현되고, 마지막으로 연회의 숨은 공로자인 100여 명의 서버들이 무대에 올라 인사를 한다. 성밖으로 나가면 소란스러움은 뚝 끊긴다. 수 킬로미터에 걸쳐 촛불이 켜진 돌담길은 연인들이 즐겨 찾는 데이트 명소다.

예술이 넘실대는 고궁

다음 날 다시 후에 궁전에 들렀다. 환한 대낮에 본 궁전은 여기저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후에 궁전은 1983년까지 5회에 걸쳐 보수공사를 했지만, 궁전은 여전히 이곳저곳이 기워진 채다. 황폐한 느낌은 없지만, 화려함과도 거리가 멀다. 성 입구에는 붉은 바탕에 노란 별이 그려진 베트남 국기가 펄럭인다.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3개인데, 가운데는 왕이, 왼쪽은 문관들이, 오른쪽은 무관들이 드나들던 것이라고 한다. 어둑한 코너를 돌때마다 새로운 볼거리가 펼쳐지니 매번 전혀 다른 스테이지로 옮겨가는 게임의 플레이어가 된 듯한 기분이다.

내측 통로에선 흑백 사진전이 열렸다. 두이 탄(Duy Tan) 왕과 카이 딘(Khai Dinh) 황제의 사진, ‘인도차이나(Indo-Chine)’ 우표가 붙어 있는 흑백 엽서엔 서양식 교육을 제공하던 동칸(Dong Khan) 학교 최초의 졸업 사진, 다낭과 후에를 연결하는 기차의 오픈 행사를 기록한 사진, 족두리와 비슷한 장신구를 머리에 쓴 궁전악단의 기념사진 등 성 안팎 풍경이 담겨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또 대비가 살던 디엔 토(Dien Tho) 궁전에는 축제 기간 동안 유럽의 아트 스쿨(Ecole Euro peenne Superieur de I’mage Angouleme) 학생들이 그린 만화 원본이 전시됐다.

향이 흐르는 강

후에는 1802년부터 1945년 사이, 143년간 구엔 왕조의 도읍지였다. 향강(香江)을 사이에 두고 구시가와 신시가로 나뉘는데, 창티엔교와 푸수언교 등 두 개의 다리가 이 두 지역을 잇는다. 후에를 가로지르는 향강은, 풀이하면 ‘향수의 강’이란 뜻이다. 종종 큰비가 내리면 빗물에 떨어진 꽃잎이 흘러들어 꽃향기가 난단다. 향강에서 티엔무 사원까지는 배로 15분 정도가 걸린다. 선두를 용머리 모양으로 장식한 작은 유람선이 부지런히 손님을 나른다.

첫 유람지는 18세기에 지어진 티엔무 사원(Chua Thien Mu). 어느 날 왕이 꿈을 꾸었는데 선녀가 이곳에 사원을 세우면 나라가 번성할 것이라고 해 사원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곳에 사원을 지으면 후대에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라고 해 이 소문을 들은 왕이 사원을 세웠다는 설도 있다. 티엔무는 ‘선녀의 절’이란 뜻. 티엔무 사원 입구에는 ‘프억 즈엔’이라는 7층탑이 서 있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사람들은 그늘에 갇힌 채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한다. 관광객들은 삼각뿔 모양의 베트남 전통 모자인 농으로 얼굴을 가리고 뙤약볕을 피한다. 여름 내 들을 매미 소리가 압축파일을 푼 것처럼 한꺼번에 쨍쨍 울린다. 사원 안에는 5개의 불상이 안치돼 있다. 젊은 여인부터 백발 할머니까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합장하며 경건한 표정으로 기도를 올린다. 천장에서 비쳐드는 세 줄기 빛과 반원형 황동그릇이 울리며 내는 소리가 신비한 기운을 자아낸다. 문턱에 걸터앉은 동자승이 관람객들에게 모자와 신발을 벗으라며 따끔하게 한 소리한다. 덩치 큰 외국인 관광객들은 입도 벙긋 못하고 모자와 신발을 벗어 든다.

티엔무 사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삼삼오오 모여 불당 뒤에서 불경을 읽거나 공동 식당을 청소하거나 마당을 쓰는 동자승들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 여느 스님들처럼 머리카락을 싹 밀지 않고 앞머리를 남겨둔 모습이 특이하다. 사원 내에 즐비한 망고 나무와 열대 야자수들도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사원 뒤편엔 푸른색의 빈티지카가 전시돼 있다. 1963년 이 사원의 주지승이 불교 탄압에 대한 저항해 호치민에서 분신자살을 기도했을 때 타고 있던 차라고 한다. 앞코가 다소 그을렸지만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

버스를 타고 15분 여를 달려 민망 황제릉(Lang Minh Mang)에 닿았다. 1840년부터 1843년 사이, 1,700평방미터 규모의 대지 위에 지어진 이곳은 응우엔 왕조의 2대 왕인 민망 황제의 무덤으로, 히우(Hieu) 묘라고도 불린다. 시내에서 14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지만, 민망황제의 무덤을 찾는 이들의 발길은 띄엄띄엄 일지언정 끊이지 않는다.

자그마한 호수를 지나면 민망 황제의 치적을 기록한 3.2미터 높이의 비석이 놓인 황제의 접견장이 나온다. 접견장 앞의 너른 마당 양쪽에는 각 6기의 동상이 놓여 있다. 왼쪽은 무관, 오른쪽은 문관인데, 양 쪽 모두 4등신에 가까울 정도로 작다. 맨 끝에 서 있는 말과 코끼리 조각도 평균보다 훨씬 작은 미니어처 사이즈다. 일설로는 민망 황제의 키가 작았기 때문에 일부러 동상을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접견장을 지나면 민망황제와 황후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절 성안사가 나온다. 베트남 정부가 1998년과 2000년에 보수를 했다고 하는데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어둔 걸 보면 공사는 아직 진행 중인 듯하다. 노랑과 초록, 적색과 금색이 주조를 이루는 경내의 제단 위엔 특이하게도 용과라 불리는 열대과일과 바나나가 올려져 있다.

에필로그

여름 내 후에는 뜨거운 열기에 휩싸인다. 그것은 뜨겁게 내리 쬐는 태양 때문이기도 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 속에 담긴 정열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뜨거움은 마음을 까맣게 태우는 대신 소낙비처럼 시원하게 온 몸을 적신다. 수천 년 역사를 간직한 고도 후에는 오늘도 여전히 뜨겁고 향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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