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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영화에 담기다

이름: 관리자 ㅣ 작성일 : 2008-08-04 오전 10:23:36

런던, 영화에 담기다

평범한 일상이라도 렌즈에 담긴 한 컷 프레임은, 그리고 렌즈에 담긴 후 스크린을 통해 비춰지는 모습은 눈으로 보는 일상과 어쩐지 조금 다르다.

너무도 평범한, 하지만 렌즈에 담긴 채 다양한 색을 입은 런던의 조금은 특별한 일상.

글 김선희 기자｜사진 박진희 기자｜취재협찬 영국관광청 www.visitbritain.co.kr 유로스테이션 02-776-7900 www.eurostation.co.kr

오랜 역사와 왕실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젠틀한 이미지를 고수하고 있지만 프랑스에 앞서 수트를 유행시킨 패션의 도시, 비틀즈를 위시하여 많은 팝그룹을 탄생시킨 열정을 가진 도시 런던은 뉴욕, 도쿄, 시드니 혹은 다른 나라의 대도시와 다른 런던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담고 있다. 패션의 도시 파리를 레드 또는 블루로, 누구나 동경하는 화려한 뉴요커들의 도시 뉴욕을 바이올렛이나 핫핑크에 비유한다면, 런던은 어떤 컬러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시원하고 명쾌하게 정의 내리기 힘든, 이런 저런 소스가 가미되어 하나의 요리로 완성된 런던은 영화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되었다. 다양한 인종이 화합하고 패션과 팝의 역사를 정립하는가 하면 런더너만의 음울한, 하지만 동시에 열정적인 삶을 담고 있는 런던은 렌즈라는 프리즘을 거치며 다양한 스펙트럼을 분출해낸다.

‘이프 온리’에서는 영화 내내 런던의 구석구석이 자연 세트장이 되었고 ‘28일 후’의 런던은 좀비가 되어 모든 사람들이 떠나버린 후 텅 빈 모습으로,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킹스 스테이션은 호그와트로 떠나는 해리 일행의 관문이 되었다. 중세 영국의 모습을 그린 영화 ‘골든 에이지’에서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은 중세의 왕궁으로 등장하며 세월의 간격을 메워 놓는다. 하루에도 수천 명의 여행자가 찾아들고 런더너들이 삶을 이어나가는 런던은 영화에서 역시 캐릭터들이 만나 사랑하고 다투며 살아가고, 또 헤어지는 삶의 공간을 제공한다.

Scene#1 우리는 모두 클로저 혹은 스트레인저

차도를 가득 메운 차들이 바삐 오가고, 마주 오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스쳐가는 혼잡한 소호(Soho) 거리. 저마다 다른 공연을 선보이는 웨스트엔드 극장가를 중심으로 도심의 작은 휴식처인 레스터 광장(Leicester Square),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이 지척에 있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레스토랑과 펍, 숍이 즐비한 런던의 번화가다. 관광객을 실은 마차와 빨간 2층 버스, 블랙캡이 차로를 메우고, 몸보다 큰 백팩을 등에 맨 젊은 여행자,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나이 지긋해 뵈는 관광객, 수트 차림에 스니커를 신은 런더너들로 포화된 이 거리에는 그야말로 생생한 활기가 넘친다.

하지만 길에서 만나는 어떤 이라도 서로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의 얼굴이 갸름했는지 둥글었는지, 머리칼이 옅은 금발이었는지 짙은 브라운이었는지도 어깨를 스치며 서로를 지나치고 나면 등과 등을 마주하는 그 순간, 곧 잊고 마는 타인들의 거리 소호에서 수백 명도 넘게 마주칠 스트레인저들이 클로저가 될 그 확률은 얼마나 될까.

희박하거나 그렇지 않은 애매한 확률을 가진 사람들이 스쳐가는 거리에서 영화 ‘클로저’의 주드 로와 나탈리 포트만은 그렇게 만난다. “Hello, Stranger.”라는 짧은 인사와 함께.

Scene#2 사랑하고 다투고 살아가고

나폴레옹의 프랑스 함대를 물리친 넬슨 제독의 기념비가 서 있는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 뒤로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를 배경삼아 템스 강을 바라보는 넬슨 제독은 50미터 높이의 원주 위에 위용 있게 서 있다. 좁은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탓에 예전부터도 라이벌 관계였던 프랑스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준 제독은 영국인 특유의 자존심을 세워주었을 뿐더러 그 자체로도 영국의 자존심이 되었고, 트라팔가 광장이 지리적으로도 런던의 중심지역인 소호에 위치한 탓에 이곳은 런더너의 생활의 중심에 있다. 그래서인지 런던이 배경인 영화의 오프닝 신에서 트라팔가 광장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랜드마크들을 차례로 조명하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나 홀로 집에’의 뒤를 이어 대표적인 크리스마스 시즌 영화로 등극한 ‘러브 액추얼리(Love Actually)’ 역시 이 곳에서 시작된다. 어둠이 낮게 깔린 거리를 크리스마스 트리에서 빛나는 조명이 밝혀주고, 광장을 중심으로 둥글게 돌아나가는 차량에서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가운데, ‘크리스마스 5주 전’이라는 자막과 함께 다양한 에피소드의 캐릭터들의 모습이 차례로 등장한다. 옛 유행가를 크리스마스 캐롤로 개사한 곡을 녹음하며 재기를 노리는 한물 간 왕년의 스타, 아내를 잃고 어린 아들과 덩그러니 남은 중년의 남자, 대역 포르노 스타,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와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다우닝 가의 수상관저로 들어서는 젊고 핸섬한 신임 수상, 세상의 미녀를 거느리는 게 꿈인 허무맹랑하고 치기어린 청년 등. 저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런더너들의 이런저런 모습을 스케치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각 에피소드마다 배경은 다르지만 오프닝 신에 등장하는 트라팔가의 모습은 런던 곳곳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이런저런 모습을 하나로 아우르며 ‘메이드 인 영국’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영화의 말미에서 왕년의 스타가 ‘크리스마스 이즈 올 어라운드’로 마침내 1위를 하는 모습 역시 이곳, 트라팔가 광장에서 시작한다.

소호, 만남의 광장

트라팔가 광장에서 내셔널 갤러리를 마주하고 섰을 때, 오른쪽 방향의 길로 접어들면 소호의 번화함을 여실히 실감할 수 있는 거리와 제대로 마주한다.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영화와 뮤지컬이 공연되는 극장 앞에는 공연 스케줄을 기다리는 이들의 긴 줄이 늘어서 있고, 도심 속 한 뼘 쉴 수 있는 공간인 레스터 광장(Leicester Square) 역시, 날씨가 좋으면 잔디밭에 눕길 좋아하는 런더너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표현에 서툴고 일을 우선시하는 영국 남자, 폴 니콜스와 그와는 정반대인 미국인 여자친구 제니퍼 러브 휴잇의 사랑을 그린 영화 ‘이프 온리’에 레스터 광장이 깜짝 등장했다. 방심했더라면, 혹은 광장 바로 앞의 호텔에 묵지 않았더라면 미처 놓치고 지났을지도 모르겠다. 여자친구가 죽은 다음 날, 또 한번 어제와 같은 날이 반복되자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하루 종일 그녀를 찾아 헤매는 폴 니콜스. 번잡한 소호거리를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레스터 광장의 작은 공원 앞에서 그녀와 뒷모습이 닮은 사람을 발견하고 어깨를 붙드는 바로 그 신이다.

레스터 광장에서 동쪽으로 가로지르면 여성들을 위한 쇼핑 스트리트가 나타난다. 어느 특정 거리가 아니라 지역 곳곳에 다양한 숍이 들어서 있어서 의류, 화장품, 홍차 등 종류를 막론하고 쇼윈도를 훑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채 10분이 되지 않아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에 닿는다.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오드리 헵번이 꽃을 팔던 이곳은 여전히 생기가 넘친다. 이름은 가든이지만 마켓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한 곳이다. 주위에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어서 노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자리를 메우고, 10분 만에 뚝딱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 저글링과 간단한 묘기를 선보이는 거리의 예술가들과 그들을 에워싼 채 연신 박수를 쳐대는 몇 무리의 구경꾼들로 즐거운 에너지가 넘친다. 코벤트 가든에서 한 블럭 떨어진 닐 스트리트(Neal Street)에는 아담한 규모의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다. 그중 강렬한 레드 컬러의 인테리어가 단연 돋보이는 레스토랑, 카페 루즈(Caf?Rouge) 역시 스크린에 등장했었다. 1994년 극장 개봉작이니 얼핏 계산해도 대략 15년 전의 옛날 영화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사랑받았던만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테다. 지금보다 한참이나 젊은 휴 그랜트의 보송보송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친구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난 미국 아가씨, 앤디 맥도웰에게 반하지만 결국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로 한 그녀와 마주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무려 31명의 전 남자친구들을 거쳐 자신이 32번 째, 예비 신랑이 33번째 남자라는 얘기를 듣고 기겁하는, 조금은 황당했던 신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다. 영화에서는 단조로운 컬러와 차분한 분위기의 카페였지만 15년을 지나오며 바와 테이블 위치 등 기본 구조는 그대로 둔 채 강렬한 컬러로 변신하며 분위기는 한층 새로워졌다.

마크 다아시와 커플이 되어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으로 출근길에 나선 브리짓 존스가 이용하던 피카딜리 서커스 역(Piccadilly Circus Station)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내와 함께 쇼핑을 하던 ‘러브 액추얼리’의 알란 릭맨이 비서에게 줄 목걸이를 고르고 미스터 빈이 점원으로 등장했던 셀프리지스(Selfridges) 백화점 역시 소호에 있다.

런던이 시작되는 곳

코벤트 가든의 카페 루즈에서 아주 낮게 경사진 길을 따라 걷다보면 따로 이정표를 보지 않고도 자연스레 서머셋 하우스를 지나 워털루 브리지(Waterloo Bridge)에 닿게 된다. 그대로 곧장 다리를 건너면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과 테이트 모던이 있는 서더크 지역이고, 다리 아래로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템스(Thames) 강을 따라 거닐 수 있다.

하루에도 4계절을 볼 수 있다는 영국이지만 5월을 지나 6월로 접어들면서 여름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맑은 대기와 온화한 햇살을 맘껏 누릴 수 있으니 안심할 것. 햇살에 반짝이는 템스의 물결 너머로 강 저쪽에서는 대관람차 런던 아이(London Eye)가 아주 느린 속도로 돌아가고 있고, 생수병 또는 아이팟을 손에 쥐고 강가를 달리는 사람들, 하얀 풍선을 가방에 매단 그룹 여행객들의 모습은 평화롭다. 간혹 그리니치와 웨스트민스터 사이를 오가는 유람선의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처음 템스와 만나게 되더라도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게다. 빨간 공중전화와 2층 버스, 홍차, 비틀즈, 빅벤 등과 더불어 또 하나의 영국의 상징인 탓에 영국과 관계되는 이슈만 있으면 템스의 풍경이 단골로 등장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주드 로의 장난으로 우연히 만나게 된 ‘클로저’의 줄리아 로버츠와 클라이브 오웬이 이곳에서 대화를 나누며 가까워지고, ‘브리짓 존스 다이어리’에서 파티를 망친 후 우울해진 르네 젤위거가 콜린 퍼스와 티격태격한 후 혼자 가 버리던 신 역시 템스 강변에서 촬영되어 어쩐지 친숙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이프 온리’는 오프닝 신을 아예 템스로 잡았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런던의 아침 풍경을 상공에서 촬영했는데 템스 강을 따라 고풍스럽고 우아하게 선 국회의사당과 빅 벤, 런던 아이,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런던 브리지를 차례대로 비춘 후 햇살을 받으며 세인트 제임스 파크(St. James Park)의 잔디를 달리는 사람을 보여주며 앞으로 일어날 사건과 대비라도 시키려는 듯이 아름답고 평화롭기만 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 속 시간적 배경 역시 이 인근의 변화를 통해 표현된다. 주위가 어둑해질 무렵, 불을 밝히는 런던 아이의 모습을 비춰 주며 밤의 장면이 시작되고, 예정된 죽음의 시간을 앞두고 폴 니콜스가 제니퍼 러브 휴잇의 손을 이끈 곳도 런던 아이다. 런던을 탈피하기 위해 고향으로 향하지만 저녁에 있을 연주회를 위해 다시 돌아온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역(Westminster Station)을 통해 템스 강변의 런던 아이에 오른다. 높은 곳을 싫어하지만 런던 아이에서 보이는, 비에 촉촉히 젖은 런던의 아름다운 야경과 폴 니콜스의 진심어린 고백에 가슴 벅차하던 제니퍼 러브 휴잇의 모습이 영화에 담겨 있다.

테이트 모던과 그리니치 천문대

템스의 남쪽, 사우스 뱅크에 모던한 분위기의 아트 갤러리,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이 있다. 원래는 2차 세계대전 직후에 화력발전소로 쓰이다가 오랫동안 방치되었는데 영국의 빨간 공중전화 박스를 디자인했던 유명 건축가 ‘버트 스콧’이 외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내를 개조하며 런던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탄생했다. 총 7층 건물에 모네와 달리, 피카소, 워홀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주제를 달리한 전시관이 들어서 있어 마니아는 물론이고 런던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테이트 모던은 어떤 영화에 등장했을까?

딩동, 역시 8편의 크리스마스 에피소드를 엮어낸 ‘러브 액추얼리’ 중 친구의 와이프 키이라 나이틀리를 몰래 짝사랑하던 남자, 앤드류 링컨의 일터였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여자의 가슴 등 신체 일부를 산타클로스의 새빨간 모자로 가린, 벽면에 가득 차는 대형 누드가 걸린 앞에서 10대들이 깔깔대고 웃자 “이건 예술이야!”라고 소리치던 앤드류 링컨의 모습을 기억하는지. 키이라 나이틀리에게 웨딩 테이프를 보여주며 속마음을 들키자 당황해하며 무작정 거리로 나와 방황하던 장면에 테이트 모던의 외관과 주위 풍경이 등장하기도 한다.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통과하는 경선이 세계 공통의 본초자오선임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천문학적이거나 과학적인 이야기는 차치하자. 처음 그리니치천문대(Greenwich Observatory)를 방문하는 이라면 뭔가 웅장하고 거창한 분위기를 기대할지도 모르지만 막상 그리니치에 닿으면 눈에 먼저 들어오는 건 저 먼 곳까지 넓게 펼쳐지는 푸른 잔디밭이다. 저마다 편한 자세로 눕거나 앉아서, 혹은 뛰어 노는 잔디밭을 명랑처자 브리짓 존스 역시 신나게 달렸었다. 쓸쓸한 크리스마스로 시작한 ‘브리짓 존스 다이어리’ 1편과 달리 마크 다아시, 콜린 퍼스와 커플이 된 2편에서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은 행복한 새해를 맞는다. 계절은 겨울이지만 브리짓의 상상 속 그리니치 앞마당에는 잔디가 푸르게 돋아 있고, 사운드 오브 뮤직의 테마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발걸음도 가볍게 나풀나풀 뛰어가 마크 다아시의 품에 폴짝 안겼었다.

모두가 사랑하는 노팅힐

노팅힐 지역, 포토벨로 로드 거리의 작은 시장은 런던에서도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거리 중 한 곳으로 성장했다. 누구나 예상했듯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의 영화 ‘노팅힐’ 덕분이다. 대체 개봉한 지 10여 년이 지났는데도 이 영화는 왜 아직 런던을 찾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노팅힐에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걸까. 누가 가더라도 아기자기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앤티크 시장과 화려한 런던의 이면을 볼 수 있는 색다른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 지역의 설명은 영화를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해결된다. 오프닝 신에서 영화만큼이나 유명한 테마곡 ‘쉬(She)’가 깔리며 휴 그랜트의 나레이션을 통해 정겹고 소박한 재래시장의 풍경을 풀어낸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비춰지는 시장의 이모저모는 여느 번화가 못지않게 영화에 감칠맛을 내는 조미료 역할을 해내며, 영화의 성공과 동시에 런던의 새로운 어트렉션이 되었다. 영화 속 휴 그랜트의 일터였던 낡은 여행 책방(The Travel Book)은 이제 이름을 달리하고 콘셉트도 전혀 다른 가게가 되었건만 아직도 여행자들은 몸집만한 배낭을 등에 멘 채 포토벨로 로드 거리의 곳곳을 누빈다. 영화 속 평범한 책방 주인 휴 그랜트가 우연찮게 헐리우드 여배우 줄리아 로버츠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예측하지 못한 만남을 기대하듯 촉촉해진 눈망울을 크게 뜬 채.

Scene#3 사람들은 모두 이별한다

만남은 이별과, 이별은 다시 만남과 맞닿아 있다. 만나는 곳에서 이별을 한 사람들은 이별한 자리에서 다시 또다른 만남을 갖기도 한다. 런더너와 세계에서 몰려든 이방인들이 만나고, 사랑하고 다투며 살아가던 런던은 동시에 헤어짐의 공간이기도 하다.

노팅힐 역시 마찬가지다. 꽃과 싱싱한 토마토, 갓 구워낸 빵이나 짭조름한 올리브 절임을 사고 팔고, 평범한 서점 주인과 헐리우드의 여배우가 만나고 사랑에 빠지게 된 노팅힐은 다른 이에게는 마음을 닫고, 이별하는 공간이 되었다. ‘러브 액추얼리’에서 지금까지도 많이 회자되는 장면 중 하나가 앤드류 링컨의 스케치북 고백 신이다. 친구의 와이프를 사랑하지만 차마 표현하지 못 하고 있다가 크리스마스라는 특별한 시즌을 빌어 무언으로, 스케치북에 담은 짧은 멘트를 통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정리했던 그곳이 노팅힐 인근에 있다. 키이라 나이틀리에게 마음을 보여주고 동시에 담담하게 정리하며 엄지손가락을 세워보인 후, 거리의 창을 통해 캐롤과 따뜻한 불빛이 흘러나오지만 인적 없는 쓸쓸한 크리스마스의 거리로 돌아서는 앤드류 링컨의 모습은 영화가 개봉되었던 그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멋진 고백 신의 하나로 꼽힌다.

히드로 공항과 런던 도심을 연결하는 익스프레스 열차가 닿는 곳, 패딩턴(Paddington) 역. 공항과 버스 정류장, 기차역은 그 자체로 만남과 헤어짐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이프 온리’의 폴 니콜스 역시 런던을 벗어나야 한다며 제니퍼 러브 휴잇의 손을 이끈 곳이 패딩턴 역이었다. ‘러브 액추얼리’의 귀여운 엔딩은 기억나는지? 에피소드가 다양했던 만큼 모든 에피소드마다 엔딩이 달랐지만 미국으로 떠나는 소녀와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히드로 공항의 검색대를 지나 질주하던 꼬맹이 토마스 생스터는 단연 최고였다. 그리고 오프닝에서 보여주었던 연인, 가족 또는 친구와 작별하고 이별하는 불특정 다수 사람들의 모습을 다시 차례로 보여주며 영화는 경쾌한 엔딩을 맺는다.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서던 앤드류 링컨과 달리, 헤어지면서도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던 토마스 생스터를 생각하면 리처드 커티스 감독은 그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소녀와 그 공항에서 또다른 만남을 가지게 될거라는 걸 은연중에 암시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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