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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의 아침거리는 한가하고 고요했다. 가끔 인근에 위치한 공항으로 이착륙하는 비행기가 그 고요함을 흔들어놓긴 했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파란 하늘과 나무, 적갈색의 땅이 있을 뿐이다. 여행을 하다가 경치 좋은 어딘가에 멈추어 느긋이 며칠을 보낼 수만 있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지 않을까. 대자연의 기운이 묻어나는 서호주의 무한한 매력 속에서 헤어나오고 싶지 않다.

우리는 호주라는 나라를 떠올릴 때 시드니나 멜버른과 같은 대도시를 먼저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이번에 기자가 찾아간 곳은 서호주의 주도이자 첫 번째 관문이라 할 수 있는 퍼스(Perth)와 진주의 고장 브룸(Broome). 우리나라에는 아직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곳곳에서 아름다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이곳은 한 번이라도 방문한 사람이라면 그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 다가오는 11월에는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물랭루즈’로 잘 알려진 호주 출신의 바즈 러만(Buz Luhrmann) 감독이 니콜 키드먼과 함께 서호주를 배경으로 이제까지 호주에서 만들어진 영화 중 가장 스케일이 크고 예산도 많이 든 영화를 개봉한다고 하니 그때 이후로는 서호주를 찾는 사람들이 좀더 많아지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안고 우선 주도인 퍼스로 떠나본다.

면적으로만 본다면 서울과 비슷한 정도지만 1천만 명에 가까운 조밀한 인구밀도를 가진 서울에 비하면 총 도시 인구가 150만 명 정도인 퍼스는 어디를 가도 사람보다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를 세어 보는 것이 빠를 정도로 조용한 도시다. 하지만 퍼스 근교 2천 킬로미터 이내에 인구가 10만 명 이상 되는 도시가 없다고 하니 이 주변으로 따지자면 이곳이 바로 대도시인 셈. 고층 건물보다는 단층 위주의 건물들이 많고, 드문드문 넓게 펼쳐진 주거 공간이 대부분이지만 시내 중심가에서는 도시의 생기를, 드넓은 호주의 여유로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그 면적만 따진다 해도 남한의 33배나 되는 서호주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금광을 비롯한 천연자원이 풍부한 데다 다른 어느 도시들보다 깨끗하고 생활수준이 윤택하다. 퍼스 역시 예외는 아니다. 집들의 반 이상이 안마당에 풀장을 갖추고 살고 있고, 소득수준 역시 호주 전체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다.

도심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의 해변에는 인도양의 아름다운 해수욕장들이 길게 이어진다. 시티 주변에만 19개의 해변이 있어 마음이 답답하거나 시원한 바람이 그리워질 때면 언제든지 바다로 달려갈 수 있는 이곳 사람들이기자는 부럽기만 하다. 그 중 코트슬로 해변(Cottesloe Beach)은 2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퍼스 출신의 배우 히스 레저가 자주 찾았던 곳이라고 한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보여준 그의 여유 넘치는 연기는 분명 이곳의 기운에서 비롯됐으리라.

프리존(Free Zone)을 중심으로 1~5존으로 나뉘는 퍼스의 시내는 그리 크지 않다. 전통과 현대의 다채로운 문화들이 공존하고 있는 듯한 CBD(중심업무지구)는 차로 5분 정도면 벗어날 수 있을 정도. 가끔 도로에서 마주치는 색색깔의 버스는 주정부가 운영하는 ‘CAT (Central Area Transportation)’이라는 무료 버스다. 블루, 레드, 옐로의 세 노선에 맞춰 운행하므로 관광객도 노선표만 있다면 관광 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시내에서 볼거리를 찾는다면 호주 화폐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조폐 박물관 ‘퍼스 민트(Perth Mint)’로 가자. 이곳에서는 순도 99.9퍼센트의 금물로 금괴를 주조하는 과정을 시연해 관광객들이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으며, 기념주화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 주는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기념품점에서 당일 날짜가 찍힌 따끈한 금화를 구입할 수도 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모든 메달도 여기서 제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안을 위해 내부 사진 촬영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다.

기자가 퍼스에서 가장 부러워했던 점은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스완강(Swan River)과 퍼스시 전체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은 도심공원인 킹스 파크(King’s Park)였다. 시민의 건강을 위한 휴식처의 필요성은 절실히 요구되지만 도심 속 녹지대가 현저하게 부족한 서울의 모습은 어쩌면 이곳과 정반대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1만 5천여 종의 야생화가 만개하는 보타닉 가든, 하늘 높이 뿜어지는 분수가 아름다운 퍼스였다. 총 면적이 400헥타르가 넘는 아름다운 파크랜드가 도시를 조용히 굽어보는 듯 퍼스의 스카이라인을 한 눈에 바라다 볼 수 있는 킹스 파크는 24시간 개방을 하기 때문에 밤이 저물면 또 다른 퍼스를 만날 수 있다. 만약 퍼스의 모습을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겨가야 한다면 이곳을 위해 마지막 필름을 아껴 놓기를 적극 권장한다. 전쟁기념비 앞에서 내려다보는 스완강과 퍼스 시내의 전경이 한 장의 그림엽서 같다.

흑조(Black Swan)가 산다고 해서 붙여진 스완 강에 내려앉는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 아침저녁으로 강 주변을 따라 사이클을 타고 출퇴근하는 직장인 등은 퍼스 시민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잘 표현하는 모습이다. 매 시마다 스완 벨 타워(Swan Bell Tower)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이 아름다운 강과 사람들의 여유로움에 톡톡히 보탬을 하고 있다.

스완 벨 타워 앞 선착장에서 캡틴 쿡 크루즈(Captain Cook Cruises) 호를 타고 1시간 정도 신나게 강을 가로지르면 프리맨틀(Freman tle)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호주는 죄수들의 유형지로 사용하기 위해 개척된 신대륙이기 때문에 그 곳을 개척한 사람들의 이름을 지명으로 쓰곤 했다. 이곳 역시 죄수들을 싣고 온 프리맨틀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는데, 퍼스 시민들의 주말 휴양지로 선호되는 이곳은 유명 건축가들이 말하길 19세기의 항구 도시의 모습을 여태까지 잘 간직하고 있는 도시 중 하나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개척시대 양식의 건축물들이 곳곳에 숨어있는 프리맨틀은 자동차만 없으면 서부 영화 세트장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고풍스럽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도착한 날은 서호주의 상징인 ‘높고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씨는 아니었다.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쏟아져 놀란 우리 일행은 바로 선착장 앞에 위치한 서호주 해양박물관(Western Austrailian Maritime Museum)을 향해 뛰었다. 독특한 형태로 바다를 향해 우뚝 서있는 박물관 내에는 호주 역사상 바다와 관련된 전시품들이 1~2층에 걸쳐 소개되고 있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선박국가가 아니었던 우린 원주민 해양문화부터 유럽인의 탐사항해, 수중 스포츠와 해군의 생활까지 바다에 관련된 전시물들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특히 16세기경 프리맨틀에서 난파한 네덜란드 선박에서 발굴된 유물들과 함께 그대로 재현해낸 선박이 눈길을 끈다.

쇼핑을 마치고 마켓을 빠져나오면 그 이름도 달콤한 카푸치노 거리(Cappuccino Strip)의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지친 몸과 다리를 달래자. 대중화된 브랜드 보다는 전통이 있는 가게를 선호하는 호주인들의 문화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스타벅스의 사이렌 간판조차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거리 양 옆으로 형성된 노천카페는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서 커피라도 한 잔 할라치면 줄을 서서 주문을 해야 하기도 한다. 그 중 퍼스와 프리맨틀을 비롯, 호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돔(Dome)이라는 커피 체인점이다. 비가 그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앉아서 친구와 수다를 떨어도 눈치 주는 사람 한 명 없어 마음이 느긋해지는 이곳은 스타벅스와 같은 대형 커피 브랜드는 감히 끼어들 수 없을 정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퍼스는 이제 슬슬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라 날씨가 꽤나 쌀쌀했지만 이곳으로부터 비행기로 2시간 반 정도 떨어진 브룸은 같은 서호주라도 인도양에 맞닿아 있기 때문에 신기하게도 퍼스와는 판이하게 다른 아열대 몬순 기후를 보였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뜨거운 열기와 습도로 인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후덥지근한 브룸은 호주의 살아 있는 아웃백 지역인 킴벌리로 가기 위한 관문 도시이자 연중 온화한 기온을 유지하기 때문에 호주인들의 휴양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수기에는 인구 1만 5천의 작고 조용한 브룸으로 그 3배나 되는 수의 관광객이 몰려든다.

브룸은 고급 진주 산지로도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불모지로 알려져 있던 브룸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 바로 진주 덕분이었기 때문. 1883년 앞바다에서 진주조개 번식장이 발견된 이래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 등 전 세계에서 진주를 채취해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나 당시에는 잠수복이나 채취 장비 등이 열악했기 때문에 인명 피해도 많았다고 한다. 이제는 인공진주가 출현해 산업이 많이 쇠퇴하긴 했지만 오늘날까지도 브룸에서 나는 진주는 전 세계 고가 진주 중 80퍼센트나 차지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대부분의 진주 양식장과는 달리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윌리 크리크 진주 농장(Willie Creek Pearl Farm)에서는 눈앞에서 진주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양식, 가공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세계에서 가장 큰 진주, 흔히 볼 수 없는 진귀한 흑 진주 등을 구경한 뒤 보트를 타고 직접 바다로 나가 양식장을 둘러볼 수 있는 있는 반나절 코스의 이 투어는 진주에 관심이 있는 여성이라면 꼭 둘러보아야 할 투어 프로그램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고급 진주를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보너스다.

마치 한 잔의 칵테일처럼 아름다운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가는 일몰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손꼽히는 케이블 비치(Cable Beach)는 브룸의 큰 자랑이다. 20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진 백사장에서 조련된 낙타를 타고 황혼을 즐기는 이색 체험은 놓치지 말아야할 로맨틱한 코스임에 틀림없다. 끝없이 펼쳐진 해변의 일몰을, 그것도 낙타 위에서 감상한다면 당신은 분명 그 어디에서도 만끽할 수 없는 자유로움을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