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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도를 가다

이름: 관리자 ㅣ 작성일 : 2008-09-01 오후 3:02:37

중국의 고도를 가다

중국은 수십 가지 색으로 뒤범벅 된 고무 찰흙 뭉치 같은 나라다. 수많은 종교와 문화, 이민족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중국이라는 이름 안에서 하나가 된다. 민들레 홀씨처럼 세계 어디서나 파랗게 싹을 틔우는 그 강인한 생명력은 아마도 이 같은 다양성에

뿌리박은 것일 게다. 유교와 불교, 도교가 아무런 이질감 없이 한 곳에서 숨쉬는 것도 중국에서라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글 안수련 기자 | 사진 박진희 기자 | 취재협찬 중국국가여유국 02-773-0393

여름 초입, 중국 허난성에 다녀왔다. 나흘간 정주와 뤄양, 카이펑을 돌아보는 일정이었다. 그 중 뤄양과 카이펑은 서안과 함께 중국의 3대 고도로 손꼽히는 도시들이다. 사실 처음 일정을 받아들었을 때 적잖이 긴장했다. 베이징이나 상하이에 다녀온 지인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나서다. 누군가는 “목소리가 너무 커서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싸움을 하는 것 같다.” 했고, 또 다른 이는 “신호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도로 위를 종횡으로 활주하더라.”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근래에 발전하기 시작한 ‘신생 도시들’이 이럴진대 중국인들이 문명의 뿌리로 여기는 고도들이야 어련하랴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중국의 고도는 그 역사만큼의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대도시에 선물세트처럼 딸려오곤 하는 소음과 매연은 발들일 자리가 없었다.

세상의 중심에 오르다

해외에서 내가 만났던 중국인들은-그들이 본토에서 왔든, 대만이나 홍콩 출신이든, 그도 아니면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 같은 중국의 영향권 아래 있던 나라의 화교들이든- 하나같이 자기 뿌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국호를 ‘세계의 중심’이라 칭하는, 그 밑도 끝도 없는 자부심의 시발점은 어딜까? 송대 4대 서원으로 꼽히는 숭양서원과 중국 최대의 도교 명승지 중악묘가 자리한 숭산(嵩山)에 들러 그 역사의 한 귀퉁이를 뒤적여 본 후에야 나는 오랫동안 새겨 왔던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도교에서는 나무, 물, 불, 쇠, 땅을 세상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로 본다. 중국에는 이 5가지 요소들을 상징하는 5개의 산이 있는데, 숭산은 그중 땅을 의미한다. 도가에 따르면 하늘의 축을 이루는 숭산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이다. 그리고 숭산의 중심엔 숭양서원이 있다. 북위 484년에 건립된 숭양서원은 초기에 불교사원으로 쓰이다가, 수나라 때 도교 사원으로 바뀌었고, 당나라 때는 서원으로 사용됐다. 유생들은 공부를 시작하기 전 반드시 사당에 들러 참배를 드렸고, 벼슬을 얻은 후에도 사당을 찾아 예를 다했다. 수업은 그리스의 아테네 학당에서처럼 토론식(講學)으로 이뤄졌다. 북송 이전의 유명인들이 대부분 이 학교 출신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서원의 명물은 수령이 2천 년이 넘는 두 그루의 측백나무다. 첫 번째 나무는 대장군백, 두 번째는 이장군백이라 불리는데, 이는 이곳을 방문했던 황제가 붙여준 것이란다. 측백나무에 대해 설명하던 연변 출신 가이드가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나무를 가리키며 “배가 터졌어요. 장군 죽었어요.”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나무둥치가 벌어진 모습이 쩍 갈라진 배 같다. 그 옆에 세워진 비석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관광지도로, 무려 460년 전에 만들어졌단다. 비석 위에는 소림사와 중앙묘, 측천무후가 살았다는 용단사 등 주요 관광지들이 표시돼 있다.

숭양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중앙탑 정문 양쪽으로는 청나라 때 주조된 돌사자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다. 입구에는 1064년에 철로 제작한 동상 4기가 서있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픈 곳이 있을 때 동상의 해당 부위를 만지면 병이 싹 낫는다고 한다. 높이 2.5미터, 무게 1,500킬로그램의 거대한 동상은 끊임없이 만져대는 관광객들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꽤 잘 보존돼 있다. 네 개의 동상이 지키는 정육면체의 붉은 집은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도복을 차려입은 노인이 오행태극문양이 새겨진 사원 앞마당을 유유히 걷는다. 나무둥치에 얼기설기 감긴 붉은 실과 사당 안에서 나부끼는 황금색과 파란색, 빨간색의 원색 천들, 허물어져가는 낡은 건물 안으로 날아드는 비둘기가 괴괴한 분위기에 묵직한 추를 얹는다. 금방이라도 까만 옷을 입은 창백한 강시들이 콩, 콩, 뛰며 지나갈 것만 같다.

무사 관우, 이곳에 잠들다

관림은 삼국지연의의 등장인물인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다. 중국 사람들은 여러 선인들 가운데 관우를 특히 좋아해서 작은 마을에서도 관우의 사당을 모신단다. 사당 뒤에는 후한 때 손권이 만들었다는 관우의 무덤이 있다. 작은 돌사자상들이 세워져 있는 다리를 건너면 본당이 나온다. 본당 안에는 40톤에 이르는 청룡도 모형이 걸려 있다. 대추색 얼굴을 한 관우상은 눈썹이 누에처럼 빽빽하고, 5갈래의 빳빳한 수염을 길렀다. 명나라 때 지어졌다는 이 동상은 80년째 보수공사 중이란다. 사당 뒤편엔 관우가 즐겨 읽었다는 ‘춘추지’도 전시돼 있다. 마당에는 측백나무와 소나무가 무성하다. 그 중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눈에 띄는데, 가지가 용머리처럼 보인다고 해 용수백이란 이름이 붙은 왼쪽 나무는 남성을, 오른쪽의 봉황백은 여성을 상징한단다. 관우에 대한 중국인들의 지대한 존경을 반영하듯, 무덤 문 앞에는 줄이 길게 이어져 있다. 무덤 가까이에서 기도드리면 바람이 더 빨리 이뤄지기라도 하는 걸까? 단순과 과격의 대명사인 관우의 사당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시간을 되돌리다

수해가 거듭된 탓에 천 년 전의 영화(榮華)를 죄다 강물로 떠내려 보낸 카이펑은 속세를 훌쩍 떠난 스님처럼 투명했다. 카이펑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송나라의 수도였던 카이펑의 옛 모습을 되살린 테마파크 ‘청명상하원(淸明上河園)’이었다. 공원 안엔 ‘공수래공수거’, 여섯 글자가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테마파크 건설의 공신은 베이징에 보관된 풍속화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송나라 때는 선이 분명하고 깔끔한 그림체가 유행했는데, 한 명 한 명의 표정과 차림새를 자세하게 묘사한 그림은 별다른 부연 없이도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담백하게 전해준다.

청명상하원 입구에 들어서자 전통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간다. 중국 양산을 쓴 고혹적인 여인네들도 보인다. 옛 재래시장 한 귀퉁이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보이는 고풍스런 분위기의 저잣거리에선 상인들이 부채를 부쳐가며 손님몰이에 열심이다. 한쪽에선 전통의상을 입은 사내가 흑갈색 동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대롱으로 설탕 뭉치에 바람을 불어 넣고 손으로 조몰락조몰락 모양을 잡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쥐나 말, 닭 같은 동물들이 만들어진다.

저녁에는 청명상하원 중앙 호수에서 공연이 펼쳐진다. 공연장과 관객석은 구분하기 힘들만큼 가깝다. 공연자들의 손에 들린 닭과 오리가 날개를 푸덕이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릴 정도다. 시간이 지나면 호숫가에 지어진 웅장한 저택에 황금빛 화려한 조명이 비추고, 호수 위에도 하나 둘씩 연등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어 무대 앞쪽에 설치된 폭탄이 터지고, 저 멀리 물 위에 뜬 배 위에선 대포가 불을 뿜는다. 펑, 펑 연이어 굉음이 몰아치자 장내엔 전쟁터 한가운데 선 듯한 긴박감이 감돈다. 호수 전체를 무대로 펼쳐지는 쇼인 만큼, 스케일의 웅장함만은 브로드웨이의 대형 뮤지컬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포청천의 도시, 카이펑

카이펑은 판관 포청천의 도시다. 90년대 초, 옛 모습을 본떠 만든 관청 마당에선 매 시간 공연이 펼쳐진다. 관청에 도착하니 극이 막 시작된 참인지 사람들이 마당을 뺑 둘러싸고 있었다. 들어보니 포청천이 처음 판관 임무를 맡는 장면인 듯했다. 채찍과 깃발을 든 시종들이 개선을 알리는데, 갑자기 한 여인이 뛰어들더니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한다. 여인은 황제의 딸과 재혼해 부마가 된 진세미의 본처 진향연이다. 포청천은 곧이어 진세미와 공주를 출두시킨다. 예전에 동명의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강직한 표정이다. 얼굴색이 검고, 이마에 초승달 문양이 찍혀 있는 것도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다. 포청천이 판결을 내릴 때면 어림없이 흐르던 박진감 넘치는 주제곡까지 울려 퍼지니 마치 드라마 세트장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드라마의 끝은? 물론 정의의 승리다. 포청천은 헐크나 핸콕, 배트맨처럼 갈팡질팡하는 요즘 히어로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고전적인 영웅이 아닌가? 그에게는 진지한 고민과 단호한 심판이 더없이 잘 어울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두를 대령하라.”는 매서운 호령에 통쾌하게 동조한다. 동정심은 끼어들 틈이 없다. 이번에도 포청천은 작두를 들였다. 황제의 친인척의 목을 자를 때 사용했다는 용작두다. 관객은 또 한 번 포청천의 손을 들어주었다.

공연이 끝나자 사람들은 장마철 물 빠지듯 관청 곳곳으로 스몄다. 담 너머에선 오재미 던지기나 활쏘기 같은 게임장이 성업 중이다. 뒤꼍에선 난데없이 서커스가 펼쳐졌다. 허리를 꺾고 뒤꿈치를 머리에 대 몸을 둥글게 마는 것은 예사고, 이런 자세로 여러 명이 탑까지 쌓아올린다. 이 기묘한 쇼를 뒤로 하고 뒷문으로 나가니 또 다른 마당이 나타난다. 비슷한 모양의 정원과 건물들 사이를 걷다보니 꼭 미로에 빠진 것 같다.

1009년에 지어진 도교사원 앞마당. 은색 도복을 입은 노인이 팔괘 위에서 요가 하듯 느릿느릿 쿵푸 동작을 시연한다. 그늘진 마당에 서서 잠시 그의 동작을 눈으로 좇는다. 그 주위에선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듯하다. 수천 년간 벌어진 아귀다툼에도 꼿꼿하게 이어져 내려온 그 유유자적한 흐름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시간을 버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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