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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바람이 불어오는 마을

이름: 관리자 ㅣ 작성일 : 2008-09-01 오후 4:26:49

새바람이 불어오는 마을

손을 모아 귀에다 대고 걸으면 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나무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 바람이 손을 타고 귀로 흘러가는 소리. 우리에게는 아직 친근하지 않은 지역인 도호쿠에는 화려하진 않지만 시간이 멈춘 듯 옛 숨결을 그대로 간직한 명소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글, 사진 김은지 기자 | 취재협찬 화인존 02-725-8233 www.finezone.co.kr

일본 혼슈의 동북부에 있는 아오모리, 이와테, 미야기, 아키타, 야마가타, 후쿠시마, 니키타의 7현을 가리키는 도호쿠 지방(東北地方). 일본을 떠올리며 우리나라로 치면 산 좋고 물 좋은 강원도와 견줄 수 있는 도호쿠 지방을 떠올리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하면 여행 정보가 많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기자 역시 여느 출장과는 달리 별다른 사전정보를 습득하지 못한 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일요일, 아오모리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출발해 가장 일찍 숙소에 도착한 3명의 기자단과 대만, 홍콩에서 온 기자들은 방금 행사가 시작된 듯한 소란스런 축제의 현장에서 처음 조우했다. 일주일 간 우리는 도호쿠의 명소를 샅샅이 파헤치는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한 배를 탄 것이다.

시작에 불과했던 무한 자연

아오모리는 ‘푸르다’라는 의미의 아오이와 ‘숲’을 뜻하는 모리가 합쳐져 만들어진 지명인만큼 울창한 원시림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일본 사과 생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유명한 아오모리는 120년 전 미국인 선교사가 사과나무를 심은 것을 계기로 ‘사과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뿐만 아니라 시라카미 산지를 비롯해 삼림욕을 만끽할 수 있는 오이라세계류, 눈이 시릴 정도로 투명한 도와다 호수, 다양한 고산식물이 자라는 하코다산 등 천혜의 자연이 구석구석을 가득 채우고 있다. 도와다 하치만 타이 국립공원에 있는 오이라세계류는 전체 길이가 14킬로미터에 달하며, 화산 활동으로 인해 생긴 칼데라 호수인 도와다 호수에서 유일하게 흘러나온 강으로 유량이 풍부하고, 산책로를 따라 숲과 물이 조화를 이룬 크고 작은 폭포가 이어져 있어 계류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25미터 높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구모이 폭포, 수량이 풍부한 초시 폭포 등 크고 작은 폭포가 계곡미를 완성해 준다. 도호쿠 자체가 고산지대인 탓에 아스팔트가 이글거리는 한여름에 간다 할지라도 서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어 삼림욕을 즐기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 좁은 오솔길을 따라 총총걸음으로 걸어가는 것에 적응이 안돼 금방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가장 큰 폭포 앞에 있다는 식당까지 가는 도중 큰 소나기를 만나고 말았다. 그제야 일본은 9월에도 태풍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뉴스가 생각났지만 이미 온몸은 쫄딱 비 맞은 생쥐마냥 볼품없어진 다음이다. 타고 온 버스마저 산책로에 우리를 내려준 뒤 이미 종착점으로 가버린 후였기 때문에 일행은 흙탕물을 튀겨가며 빗길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비가 와서 일정이 뒤틀린 것이지만 오이라세계류로 간다면 그래도 도보 트레킹을 적극 추천한다. 산책로를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적당히 따스한 햇살에 바람까지 솔솔 불어오기 때문에 마음마저 시원해진다.

일본인들의 영지(靈地)

아오모리 현 최북단에 위치한 시모키타 반도에는 이색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죽은 이의 영혼이 깃들었다는 오소레잔은 휴화산으로, 아직 지면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으며 유황냄새도 심하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영지(靈地)와 종교 사원, 수도원들은 대부분 바위산에 터를 잡고 있다는데, 오소레잔 역시 나무도 별로 없고, 풀도 없는 스산한 곳에 위치해 있어 간담이 서늘해진다. 단어 자체가 우리말로 ‘무서운 산’이란 뜻으로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데 정말 이곳은 살풍경하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영혼이 모인다는 이 산은 일본의 3대 영산 중 하나로 주로 아기들의 영혼이 모이는 산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호수의 물가에는 아이들 장난감, 바람개비, 꽃 그리고 지조라는 보살의 상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는 죽은 영혼, 특히 어린 영혼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이 놓고 간 것이라는데, 이쯤해서 온몸이 오싹해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육대지장(六大地藏)상을 지나 입구로 들어서면 오소레잔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우직하게 서 있다. 한국 사찰로 치면 천왕문에 해당하는 것 같은데,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사천왕상으로 네 명의 수호신이 지키고 있지만 일본은 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여름에 보다이 절 축제에 가게 되면 ‘이타코’라고 불리는 여성 무당이 죽은 이로부터 심령 메시지를 전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이곳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기자는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문명의 혜택에서 잠시 벗어난 에코 투어

아오모리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야마가타현은 일본의 여느 번화한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산림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자연의 고장으로,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가을에는 마을 전체를 붉게 뒤덮는 단풍으로, 겨울에는 일본 최고의 유황 온천과 자오 스키를 즐기러 일본 전역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이 작은 도시는 사시사철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하긴 현의 70퍼센트가 울창한 산림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찌 공기가 좋지 않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야마데라 전산을 전망할 수 있는 언덕 위에 야마테라바쇼 기념관 정원 한쪽에는 지일파로 알려진 ‘라이샤워’ 전 주일 미국대사의 방문 기념비가 있다.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일본을 알려면 도쿄를 보고, 야마가타를 봐야한다. 도쿄에서는 고도의 기술문명이 발달한 현대사회를 볼 수 있고, 야마가타에서는 일본의 전통적이고 때 묻지 않은 자연을 볼 수 있다’. 도호쿠를 돌아보는 동안 야마가타에 오랜 시간 머물지는 않았지만 이 말에는 절대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동하는 동안 비춰지는 창밖의 모습은 푸르기 그지없었으니 말이다.

긴 여정을 지면으로 옮기자니 간단하게 온 것 같지만 도호쿠란 지역이 우리나라의 강원도보다는 몇 곱절이나 큰 곳이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전반을 둘러보려니 구불구불한 산비탈을 버스를 타고 하염없이 이곳까지 내려 온 것만 쳐도 수십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건 약과다. 산꼭대기에 있는 절을 보기 위해서는 천 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단다. 평소 걷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이지만 버스에서 간만에 내려 걷는 곳이 산꼭대기라니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

야마가타현의 북동부에 있는 고승 지카쿠다이시가 릿샤쿠지는 860년에 창건한 절로서 개산이라고 전해지는 도호쿠 지방 굴지의 유명 사찰이다. 울창한 노목이 우거진 호우쥬 산 전체가 경내로 되어 있으며, 광대한 사역 곳곳에 바람과 물의 침식에 의한 바위 구멍과 기암이 있는가 하면 ‘곤폰스도우’를 비롯한 여러 당의 탑이 남아 있다.

모두가 하나 되는 마츠리

이번 도호쿠 여행에서 일본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일본의 축제 문화다. 지역별로 개최되고 있는 전통 민속축제를 일본말로 ‘마츠리’라고 하는데, 일본은 일년 내내 어딘가에서 마츠리가 열리고 있을 것만 같은, 마츠리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마츠리는 일본 열도에 살기 시작한 사람들과 그 역사를 같이할 만큼 오래된 문화 중 하나다. 일찍부터 농경사회를 이루어 온 일본의 경우, 천재지변으로부터 마을의 평안과 풍작을 신에게 기원하는 의례 행위에서 시작돼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먹고 마시던 행위가 바로 마츠리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각 지역사회의 이미지 개선과 관광 활성화를 내세워 그 지역만의 다양한 행사와 이벤트가 만들어져 개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 있는 수많은 마츠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에도 안동 하회마을이나 제주도 등 각 지역별로 지역주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다양한 볼거리를 개발해 관광 사업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그러나 일본만큼 각각의 도시에서 저마다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는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 중 네푸타 마츠리는 일본을 대표하는 불의 축제로 각지에서 열리는 마츠리 중에서도 가장 크게 성장한 축제라고 할 수 있다. 매년 350만 명 이상이 보기만 해도 무서울 정도로 과장되게 표현된 네푸타를 보기 위해 아오모리를 방문할 정도로 인기가 높은 이 행사는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 전 어느 동네에서 서민들이 등롱을 손에 들고 춤을 춘 것에서 비롯됐다는 기록이 있으나 전쟁 후 두 번의 큰 화재로 인해 관련 자료가 모두 소실되었단다. 또 다이쇼 시대부터는 전기가 보급되면서 시내의 전선으로 인해 높이가 건물 7~8층 높이나 되었던 네푸타가 점차 소형화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키가 20미터에 18톤의 무게를 유지하고 있으니 결코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없지만 말이다. 다치네푸타 전시관에는 축제가 끝난 네푸타를 그대로 옮겨와 보관하기도 하고, 바로 다음 축제를 위해 새로운 네푸타를 제작하는 곳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제작소에서는 부분 얼게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종이를 바르고, 경랍에 이어 채색까지 지역 주민들이 자청해서 완성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네푸타가 워낙 커서 축제가 바로 끝난 직후 새 작업에 들어가 꼬박 1년 동안 만들어야 하나의 거대한 등불이 완성된단다. 그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신기해하며 탄성을 지르는 동안에도 각자 맡은 작업에 충실한 지역 장인들의 열정에 박수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많이 가봤다는 단순한 이유로 ‘도쿄’가 일본의 전부라고 느꼈던 기자는 천혜의 자연과 그들만의 이색적인 문화를 변함없이 계승하고 있는 도호쿠를 방문하고는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일본의 멋을 한아름 품고 돌아온 듯한 느낌을 벗어낼 수 없다. 이곳은 화려하진 않지만 언제 찾아가도 나를 반겨주는 넉넉한 할머니의 품과 같은 또 다른 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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