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휴양지를 찾는 이유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휴식을, 휴식을 위한, 휴식에 의한 휴식을 즐기려는 것. 코타키나발루는 휴식의 사전적인 의미에 충실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데스티네이션이다. 남중국해를 바라보는 해안과 조용한 시가,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솟은 키나발루 산까지, 닷새가 보통인 휴가 기간을 짜임새 있게 나눠 휴식과 액티비티의 스케줄을 구성하기에 그만이다.
글 김선희 기자|사진 박진희 기자
여행을 계획할 때, 가장 많이 고민하게 되는 부분은 아무래도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의 문제이다. 오랫동안 오매불망하던 꿈의 데스티네이션이 있다면 상관없지만, 보통은 도시의 생기와 전원의 느긋한 공기, 또는 산과 바다를 양팔 저울의 접시에 각각 올려두고 어느 쪽으로 더 맘이 기우는지 측정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게 마련이다.
산과 바다의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고 싶은, 의욕 넘치는 여행자에게 코타키나발루(Kota Kinabalu)를 툭 던져 본다. 서쪽의 말레이 반도와 동쪽의 보르네오 섬으로 나뉜 말레이시아에서도 가장 동쪽에 있는 사바(Sabah) 주의 중심도시인 코타키나발루는 페낭, 말라위 등과 더불어 말레이시아의 대표적인 휴양지인 동시에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높다는 키나발루 산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지리적으로 보자면 바다와 산을 두고 고민했던 이들을 위한 필요조건을 만족하게하겠지만, 필요충분조건까지를 만족시키는 최적의 데스티네이션인지는 이제부터 확인해 볼 일이다.
하늘에 맞닿는 길
코타키나발루 시가를 출발한 지 2시간이 좀 넘었을까, 구불구불한 산허리를 감고 한참이나 올라와서야 마침내 차가 섰다. 산을 오르는 동안에는 저쪽 산봉우리가 구름에 가렸다가 벗어나기를 반복하기는 했지만 해가 쨍했는데, 어느 틈엔가 주위엔 안개만 자욱하다. 시야가 어두워 그런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 구름이 겹겹이 하늘을 막고 있을 뿐이다. 후텁지근한 공기 때문에 이마에 진득하게 배어나던 땀도 쏙 들어가 버리고 살갗에 스치는 서늘한 바람에 오싹한 기분마저 드는 걸 보면 고도가 높긴 한가보다. 아직 산의 중턱에도 미치지 못한 지점이지만 해발고도는 벌써 1,866미터나 된다. 나무로 엮은 간이 시설물에 팀포혼 오두막(Pondok Timpohon)이라는 현판이 붙었다. 거대한 키나발루산으로의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는 곳이다.
지난 2000년, 유네스코에 의해 말레이시아 최초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키나발루 산(Gunung Kinabalu)은 백두산보다 훨씬 높은 해발고도 4,095미터를 기록하는 동남아시아 최고봉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도 고도에 따라 날씨와 기온이 다르고 산 아래의 열대림에서부터 산 정상의 침엽수림에 이르기까지 군락이 달라 하루에 여러 개의 계절을 경험하는 일 역시 키나발루 산에서라면 가능하다. 1964년에 키나발루 국립공원(Kinabalu National Park)이 조성되었고, 세계적인 동식물의 보고로 유명한 이곳에서는 실제 완벽한 생태계를 보유했다고 알려져 등산객이나 여행자를 제외하고도 많은 학자가 몰려든다.
말레이시아 사바 주의 원주민인 카다잔(Kadazan) 족의 언어로 ‘죽은 자를 숭배하는 장소’라는 뜻의 아키나발루(Akinabalu)에서 유래한 이름이 지금까지 내려오듯 카다잔 족은 지금도 산의 정상에서 조상의 혼을 달래는 의식을 연다. 죽은 자의 혼이 산꼭대기에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유의 속설이나 미신은 세계 어느 곳에도 있기 마련이지만 키나발루 산이 그 배경이 된 데는 워낙 높기도 하거니와 고도별로 생태계의 모습이 달라지다가 정상을 향해 올라갈수록 우거진 나무와 꽃들, 동물의 흔적은 옅어지고 오직 회색 바위만 삐죽 솟아 있는 낯선 풍경도 한몫했다. 굳이 토테미즘이니 샤머니즘을 들먹이지 않고도 인간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는, 자연의 영역에 한참이나 들어와 버린 듯한 곳에서라면 삼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는 생명체 이상의 존재를 떠올리는 일이 그리 무리는 아닐 터. 눈에 보이는 거라곤 360도 가득 펼쳐진 하늘과 그 망망한 하늘에 닿을 듯 삐죽이 솟아 있는 바위 봉우리, 그리고 산 저 아래쪽을 감은 구름이 고작인 모습은 아무래도 예사로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키나발루 산 트레킹
다시 등산로 앞.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무거워 뵈는 구름 때문인지 주위가 어둑어둑하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등산로 입구에는 두툼한 등산복에 등산화를 챙겨 신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서 가이드를 기다리고 있다. 숲이 울창하고 오솔길이 끝나면 바위를 연결하는 로프를 타고 오르기도 해야 하는 키나발루 산의 정상에 오르려면 누구라도 산을 잘 아는 등반 가이드를 대동해야 하기 때문. 적게는 한 명에서 많게는 여덟 명까지 한 조를 이뤄 등반하는데 지금 등산로에 선 이들은 이미 수개월 전에 등반 예약을 마치고, 퍼밋까지 받은 상태다. 4천 미터가 넘는 정상에 올랐다가 돌아오기까지 대략 1박 2일의 일정을 잡아야 하는데, 정상 부근의 산장에서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어서 최소한 6개월 이전에는 신청해야 원하는 때에 산에 오를 수 있다.
키나발루 국립공원에 오르려면 오피스에 입산 등록을 하고 퍼밋을 신청해야 한다. 퍼밋을 받은 후 가이드와 함께 등산로로 들어서면 정상에 닿기까지 몇 시간이건 그저 걸어야 한다. 차가 진입하기는커녕 케이블카조차 없어서 일단 등산로에 발을 디디면 선택은 오로지 두 가지 길밖에 없다. 끝까지 오르거나 중도에 돌아오거나. 대개는 몇 개월을 기다리며 등산 준비를 해온 터라 정상에 올라서서 발아래로 펼쳐지는 코타키나발루의 시가와 남중국해를 눈에 담고 내려오게 되지만 말이다.
언제 어느 때에 등산로로 들어서건 반드시 산 중턱의 숙소에 한 번씩 묵어가게 된다. 하루 만에 정상에 오르기는 무리이거니와 설사 오른다 하더라도 내려오는 시간을 고려하면 어떻게든 쉬어갈 수밖에 없다. 2,700미터 지대의 라양라양(Layang-Layang Hut)을 시작으로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3,668미터에 있는 사얏사얏(Sayat-Sayat Hut)에 닿기까지 등산객이 쉬어갈 수 있는 크고 작은 숙소가 몇 개 있는데, 7개의 숙소를 모두 합해도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170여 명이 고작이다. 높은 산 중턱이지만 온수며 히터 설비가 된 숙소에서 샤워와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친 후 잠이 들었다가, 다음 날 새벽 3시면 어김없이 등반이 시작된다. 조도가 낮은 랜턴의 불빛에 의지하며 달의 표면 같은 바위길을 걷다보면 조금씩 시야가 밝아지고, 마침내 카다잔들이 조상의 혼이 머문다고 믿는 정상에 다다른다. 하늘도, 정상의 바위도, 구름도 멈춘 듯한 곳에서 간혹 미동을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바람뿐이다.
키나발루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
등산로에서 산 아래쪽을 향해 40킬로미터가량 이동하면 고산 트레킹과는 또 다른 키나발루 산의 묘미를 즐길 수 있다.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100퍼센트 유황온천이 퐁퐁 솟아오르는 포링 핫 스프링(Poring Hot Springs)이 그곳. 키나발루 산 등산을 끝낸 후 근육의 긴장을 풀어주러 왔건, 그저 온천을 목적으로 찾아왔건 광물 성분이 풍부하다는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어느 순간엔가 어깨를 누르고 있던 피로가 슬그머니 가신다. 오픈된 공간에서 여럿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대형 수조는 물론이고 가족이나 친구끼리 사용하는 소형 온천 수조,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온천을 즐길 수 있는 방갈로, 아이들을 위한 야외 풀까지 수조의 크기와 수온에 따른 다양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마음 같아서는 출장에 지친 몸을 온천에 담그고 땀이라도 흘리고 싶었지만, 빠듯한 일정에 쫓겨 바지를 걷고는 온천 한 편의 족욕탕에 잠시 발을 담갔을 따름이다. 발가락과 발등에 연방 몽글몽글 생겨나는 기포가 어깨 위의 피로곰을 없애주길 바라며.
온천 지역을 벗어나 산으로 향하면 아기자기한 나비 전시관과 나비 농장을 지나 캐노피 워크웨이가 설치된 곳으로 통하는 오솔길이 나타난다. 온천 이용객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가까운 곳에 설치했다고는 하지만, 후텁지근한 공기로 휩싸인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30여 분간은 그리 녹록지 않다. 연방 땀을 훔쳐가며 가파르거나 비교적 완만한 길을 올라가면 비로소 정글의 중간에 175미터에 걸쳐 길게 이어지는 캐노피 워크웨이가 나타난다. 5개의 나무를 연결하며 철제 와이어와 그다지 두꺼워 보이지 않는 나무판자만으로 연결된 캐노피가 살짝 불안해 보이지만 성큼 올라서 본다. 보기와 달리 탄탄한 느낌에 슬그머니 맘이 놓인다. 정글 사이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에 산을 오르느라 벌겋게 달아오른 볼이 식는 느낌이다.
코타의 바다를 누려라
동남아시아 대부분 국가가 유명 휴양지 한두 곳쯤은 갖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코타키나발루는 말레이시아라는 나라 이름을 들먹이지 않고도, 코타키나발루 그 자체로 유명하다. 명성 탓인지 코타키나발루의 해안가에는 유독 고급 리조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남중국해를 향해 줄 선 듯 늘어선 리조트들은 저마다 바다를 끼고, 혹은 바다와 어우러지도록 설계되어 있어 굳이 해안으로 나가지 않고도 객실 침대에 앉아 푸르디푸른 바다와 수평선까지 모두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바다를 배경 삼아 책을 읽거나 풀장의 선베드에 누워 태양의 열기를 흡입하는 것으로도 뭔가 부족하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바다로 뛰어들 순서다.
코타키나발루 앞바다에 조성된 툰구 압둘 라만 해양 국립공원(Tunku Abdul Rahman National Marine Park)에서라면 바다에서 할 수 있는 각종 해양 액티비티를 체험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소금기가 밴 바닷바람을 가르며 요트로 이 일대를 돌아볼 수 있다. 도심의 항구나 어시장 등, 바다가 보이는 곳 어디에서라도 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크고 작은 섬이 몇 개 있는데 가야(Gaya), 사피(Sapi), 마누칸(Manukan), 마무틱(Mamutik), 수룩(Sulug)의 5개 섬과 그 연안의 바다 일대가 해양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중 가야 섬과 사피, 마누칸이 널리 알려졌고, 또한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섬이기도 하다.
코타키나발루의 선착장에서 쾌속 보트에 오른 지 20분 남짓, 마누칸 섬의 선착장에 닿는다. 섬의 모양새가 남중국해 인근의 바다에 서식하는 ‘마누칸’이라는 물고기와 비슷해 같은 이름이 붙었다는 마누칸 섬은 연안의 수심이 얕아, 섬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길게 나와 있는 선착장의 나무바닥 아래로 크고 작은 열대어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선착장의 곳곳에서 사람들이 뿌려대는 마른 빵조각이 떨어지는 위치에 따라 연방 방향을 트는 모습에 한주먹 가득 빵조각을 쥐고는 몇 개씩 던져준다. 열대 지역의 어느 곳에 가더라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고, 호주에서는 해변에까지 몰려온 돌고래 입에 물고기를 넣어주기도 했지만, 매번 처음 보는 양 신기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사람의 머리보다 몇 배는 큰, 헬멧처럼 보이는 안전도구를 뒤집어쓴 채 물속을 누비는 해저 오토바이 ‘스쿠바 두’를 타려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수영하는 사람들, 물가에서 퐁당거리는 아이들, 섬 인근을 날며 패러 세일링을 하는 사람들로 섬의 해변과 하늘은 복작인다. 사전에 예약하지 않아도 해변 곳곳의 강습소에 신청하면 곧바로 안전요원과 함께 바다로 입수할 수 있으니 줄지어 기다리는 노고도 가볍게 생략. 슬리퍼를 신은 채 무릎이 잠길 정도의 깊이에까지만 들어가 어슬렁대며 이것저것 구경해 가며 걷는데도 섬이 그리 크지 않아 그런지 선착장에서 시작해 사람들이 노는 해변의 끝까지 갔다가 돌아왔는데도 채 한 시간이 넘지 않았다.
바다로 한참을 들어가도 바닥이 보일 만큼 맑은 물에서 갓 잡아 올린 랍스터와 얼핏 봐도 내 손에 올리면 길이가 비슷할 듯한 큰 새우를 굽는 고소한 연기가 해안을 돌다 대기 중으로 사라진다. 어느덧 점심때가 다가온 것이다. 카레가루를 묻혀 구운 치킨, 칼칼한 톰양 쿵, 아무 양념 없이 불 위에서 곧바로 구워낸 새우와 게, 각종 생선구이, 파인애플을 넣어 지은 밥 등 해변에는 다양한 시푸드 뷔페 메뉴로 가득 찬 테이블이 길게 늘어섰다. 욕심 같아서는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재료로 요리한 음식들을 골고루 맛보고 싶지만 충만하게 통통한 새우 3마리가 주는 포만감은 결코 무시할 것이 못 된다. 나른한 걸음걸이로 테이블 아래를 지나는 고양이를 따라 시선을 옮기는데 바다 저쪽에서 다가오는 보트가 눈에 들어온다. 코타키나발루로 돌아갈 시간이다.
점심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하늘은 화창하고 맑기만 했는데, 보트에 오르고 섬에서 멀어지자 거짓말처럼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요즘 코타키나발루는 아침엔 화창한 하늘을 보이다가도 점심때를 조금 넘겨 오후 1시, 2시 쯤이 되면 어김없이 먹구름이 몰려들며 비를 뿌린다. 어느덧 우기로 접어든 것이다. 구름이 하늘을 온통 새카맣게 뒤덮은 채 무서운 기세로 쏟아지고 있지만, 저녁 시간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하늘은 다시 구름 사이로 말간 얼굴을 드러낼 것이다. 비가 그친 저녁에는 석양이 예쁘게 내려앉는 항구의 어시장에 나가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