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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 해의 낙원, 두브로브니크

이름: 관리자 ㅣ 작성일 : 2008-11-05 오후 2:45:29

아드리아 해의 낙원, 두브로브니크

어떤 일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브래드 피트가 여전히 사랑받는 중년이 된 것도, 대체 천 년도 훌쩍 지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아직 높게 평가받는 것도, 그리고 두브로브니크가 아드리아 해의 진주로 칭송받으며 발칸반도 최고의 휴양지로 자리매김한 데도 말이다.

글 김선희 기자｜사진 문유선 기자

“보스니아 스탬프를 받을 수 있을까?”

바다 절벽 위로 난 좁은 2차선 길 위를, 그것도 가로등조차 없는 곳에서 교교한 달빛과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에만 의지한 채 두브로브니크를 향해 밤길을 달리며 생각한 것은, 우습게도 여권 한구석에 보스니아 입출국 스탬프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초승달 모양 혹은 거꾸로 엎어 놓은 기역(ㄱ)자 모양을 한 크로아티아에서도 남쪽 끝 부분에 위치한 두브로브니크(Dubrovnik). 수도 자그레브(Zagreb)와 함께 이곳 두브로브니크에도 국제공항이 있어서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취항하는 직항 비행기를 탈 수 있고, 이탈리아나 그리스 등 지중해 인근 국가에서 크루즈를 이용하거나 자그레브에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도 되지만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설렘을 배가시키고, 아드리아 해의 절경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역시 길은 멀어도 바다를 낀 국도를 따라가는 것이 좋다. 물론, 가는 과정은 그리 녹록지 않다. 자그레브에서 스플리트(Split)까지는 고속도로가 뻗어 있어 신나게 달리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 스플리트에서 두브로브니크로 내려간다면 거리는 불과 200킬로미터 남짓이지만 거기서부턴 고속도로가 없어서 해안으로 난 왕복 2차선의 외진 도로를 곧장 따라가야 하므로 막상 소요되는 시간은 거의 4시간 가량. 더군다나 밤에 이동한다면 가로등도 없는 외진 산길에, 그것도 아래로는 아드리아 해의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바다와 맞닿는 낭떠러지이니 속도는 더욱 느려지게 마련이다.

극작가 버나드 쇼가 “진정한 낙원을 원한다면 두브로브니크로 가라.”라고까지 극찬했다는, 유러피언들의 오랜 꿈의 데스티네이션으로 향하면서 난데없이 보스니아 스탬프 운운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아드리아 해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크로아티아의 끝자락 중 스플리트에서 두브로브니크로 향하는 외진 바닷가 국도의 일부, 15킬로미터 구간 가량이 보스니아의 영토인 까닭에 어쩔 수 없이 보스니아 땅을 밟아야 하는 것. 오랜 내전으로 흉흉하다는 소문만 멀찍이서 들었을 뿐인 미지의 땅 보스니아를 통과한다는 흥분은 확실히 두브로브니크에의 설렘에 앞서고 있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인지 국경검문소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간소한 오피스를 차창 옆으로 그저 스치고 지나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스탬프는커녕 지금껏 달려온 크로아티아 해안길과 손톱만큼도 다르지 않은 15킬로미터를 통과해, 다시 크로아티아. 그리고 40여 분만에 드디어 버나드 쇼가 극찬한 그 낙원, 두브로브니크에 닿았다.

시간이 멈춘 그곳

누구라도, 두브로브니크 성벽 안 구시가에 발을 딛는다면 이해할 것이다. 두브로브니크가 왜 버나드 쇼의 낙원이 되었는지.

바다 위의 요새에라도 들어서는 듯, 모래색 성벽으로 연결되는 돌다리를 지나 플로체 게이트(Ploce Gate)로 들어서면 자연스레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마을을 감싸듯 굳건하게 둘러싼 성벽을 울타리 삼아 가로로 길게 누운 메인 스트리트 플라카(Placa)에는 두브로브니크가 건설되었을 때 깔아둔 대리석이 낡고 닳아 반지르르 윤기를 발하고, 플라카의 건너편은 성의 또 다른 관문인 필레 게이트(Pile Gate)로 연결된다. 플라카를 중심으로 구시가는 바다에 접한 남쪽과 뒷산의 경사면으로 이어지는 북쪽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양편으로 가지런하게 들어선 바로크 스타일의 고풍스러운 집들은 세월도 시간도 비켜간 듯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 물론, 처음 두브로브니크의 모습은 아닐 터. 지금은 더없이 평온하고 아름다운 마을로 유러피언들의 꿈의 데스티네이션이 되었지만, 지금의 두브로브니크가 있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7세기 중반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이후, 아드리아 해와 지중해의 경계가 되는 요지에 있는 두브로브니크는 세계 각국과 무역을 하며 곧 주목받는 항구도시가 되었고, 아드리아 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이탈리아로부터 비잔틴 문화가 전해지며 가장 번성했던 지중해의 해상도시 중 하나로 발전한다. 하지만 1600년대 중반, 유럽에서 일어난 지진 중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강한 지진이 두브로브니크를 덮쳐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고, 연이은 화재로 또 한 번 큰 피해를 입는다. 르네상스, 고딕, 로마 양식의 건물들이 공존했던 구시가가 바로크스타일로 재단장된 것도 이 무렵 부터다.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7세기에 축조된 성벽은 여전히 굳건하게 서서 낡은 시가를 보듬고, 수도원과 교회, 궁전 등 구시가 곳곳에 남은 다양한 양식의 건물들이 오랜 유럽의 역사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두브로브니크의 구시가지는 1979년, 그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두브로브니크의 불운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90년대 초반, 독립을 꿈꾸는 크로아티안을 누르기 위한 유고슬라비아의 공습이 시작되었고, 고이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아름다운 도시는 폭격에 무너져 내렸다. 공습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유럽의 지식인들이 두브로브니크 앞바다에 보트를 타고 나가서 “우리를 먼저 폭파하라.”라며 도시를 지켜냈던 일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몸으로 막으면서까지 이국의 도시를 지키고 싶었던 그들의 바램은 두브로브니크가 단순히 시간이 멈춘 듯 변하지 않은 중세의 고풍스러움을 간직한 도시였다거나, 파란 바다와 대비되는 붉은 지붕이 아름다운 곳이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구시가 곳곳에서 발견되는 역사의 숨결과 도시의 아름다움, 전쟁을 거쳤으면서도 여전히 낙천적인 사람들의 여유로움 등이 혼재된, 두브로브니크에서만 가질 수 있는 그 특유의 공기를 사랑해서였을 것이다.

버나드 쇼의 낙원

반질반질 윤이 나는 플라카의 거리를 걷는 것도, 남북으로 곧게 난 좁은 골목길을 구석구석 돌아보는 것도 좋지만, 두브로브니크의 묘미는 역시 구시가의 경계가 되어주는 굳건한 성벽(City Wall)에 올라서서야 만끽할 수 있다.

성벽으로 오르는 입구는 성과 외부를 연결하는 두 개의 메인 게이트 근처에서 찾을 수 있다. 입장료는 일인당 50쿠나(Kn). 1유로가 7.2쿠나 가량이니 대략 잡아도 7유로. 요즘 같은 환율로는 1만 원을 훌쩍 넘으니 결코 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단언컨대, 성벽에 오르는 순간부터 입장료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은 깨끗하게 사라질 것이다.

오른쪽 성문인 플로체 게이트의 입구를 통해 성벽으로 올랐다. 한 방향으로 걷도록 표시가 되어 있어, 플로체 게이트로 오르면 구시가의 마을 뒷부분을 먼저 돌아보게 된다. 다닥다닥 이어지는 크로아티아 그 특유의 붉은 지붕들의 물결 가운데 오랜 역사의 포스가 풍기는 교회 종탑이 삐죽 솟아 있고, 그 밖으로 망망한 아드리아 해가 펼쳐지는 풍경에 그저 탄성만 연발한다. 13~16세기에 축조되었다는 성벽은 전쟁이나 자연재해와 무관한 듯 믿을 수 없을 만큼 보존 상태가 완벽해 보인다. 폭이 2미터는 되어 보이는 넉넉한 성벽을 따라 걷다 보니 그림 같게만 보이는 이 구시가도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구나 싶다. 붉은 지붕 사이에서 좁은 골목을 가로질러 널린 빨랫줄에는 하얀 빨래가 흩날리고, 골목의 돌계단을 폴짝이며 뛰어올라오는 아이들, 포도 덩굴이 자라는 베란다에서 신나게 담배연기를 내뱉는 젊은 아가씨, 여행자를 대상으로 민박이라도 꾸리는지 2층 방에 놓인 여러 개의 침대를 정리하는 아주머니의 모습도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보인다. 봐도 될지 안될지 모르는, 어쩌면 공공연한 비밀을 봐버렸다는 생각에 머쓱해하며 성벽을 걷다 보면 성벽에 바짝 붙은 가정집도 가정집이지만, 메인 스트리트인 플라카에 인접한 교회와 궁전, 분수대 역시 눈에 들어온다. 유럽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약국이 있다는 프란체스카 수도원(Franciscan Monastery-Museum)의 높은 지붕, 옛날에 두브로브니크를 다스리던 렉터가 거처했다는 렉터의 궁전(Rector`s Palace), 화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베네치아 풍의 건물 스폰자 궁전(Sponza Palace) 등 보지 않으려 해도 구시가지의 속살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인다. 때로는 계단을 올랐다가, 평평한 길을 걸어도 갔다가, 바다를 내려다보는 망루에 올라도 보고 걸으면 반대편의 필레 게이트에서 통하는 입구에 다다른다. 성벽을 고스란히 한 바퀴 돌면 2킬로미터가 된다는데, 그 절반을 걸은 셈이고, 이제부터는 눈앞에 바다가 펼쳐질 순서다. 펜으로 스케치한 두브로브니크의 풍광을 그린 그림을 물감으로 옅게 채색하는 할아버지를 지나, 아드리아 해 건너 저편 어딘가에 있을 이탈리아를 상상하며 걷는데 사방이 조금씩 붉게 물든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6시. 이제 30분만 있으면 해가 질 테고, 성벽 관리인이 나타나 여전히 느린 걸음으로 여유를 부리고 있는 여행자들을 몰아낼 시간이기도 하다. 쫓겨날 때 나더라도 바다 위에서 일몰을 지켜보겠다며 버티고 섰으려니 정지된 화면 같던 주위가 움직이며 일상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성벽 아래에서 철썩이는 파도소리, 쉴 새 없이 지나가는 보트의 엔진소리, 근처 카페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함께 성 안 공터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음에 한국만큼이나 축구에 무한 애정을 쏟는 크로아티아에 있음을 실감한다.

아드리아 해 탐험에 나서다

마음을 비우고 손톱 끝만큼의 기대도 하지 않은 채 두브로브니크와 조우한 것도 사실이지만, 무방비 상태에서 맞닥뜨린 두브로브니크에 아주 보기 좋게 허를 찔린 후 내내 감탄사만 연발한 다음 날 아침. 한 선착장에 섰다. 운 좋게도 보트를 얻어 타고 아드리아 해로 나설 기회가 생긴 것. 크지 않은 보트였지만 무릎을 맞대고 나란히 앉아도 불편하지 않은, 서너 명이 함께 오붓하게 항해하기엔 딱 좋을 사이즈다. 스키퍼가 보트와 항구에 각각 한쪽 발을 딛고 선 채 살살 보트의 방향을 돌리다 항구를 한번 밀어내자 보트가 바다 쪽으로 성큼 밀려나온다.

우리나라의 서해안처럼 크로아티아 앞바다 아드리아 해에도 크고 작은 섬들이 수도 없이 솟아 있다. 북쪽으로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이루는 이스트라 반도에서부터 남쪽의 두브로브니크 인근까지 치자면 유무인도를 합해 천여 개가 넘는 섬들이 있다하니 정확한 숫자를 헤아리기도 어렵다. 두브로브니크 인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섬은 코르출라(Korcula)로, 올리브 나무가 우거진 숲과 동방원정을 떠났던 오리지널 모험가 마르코 폴로의 집이 남아 있어 더욱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지금 보트가 향해가는 곳은 세인트 안드리아(St. Andrea) 섬. 출발하며 이름만 들었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는 상태다.

항만을 빠져나와 스플리트에서 두브로브니크로 오며 지나쳤던 바다 위로 난 긴 다리를 오른편으로 지나치고, 보트는 점점 더 망망한 바다로 나가고 있다. 그렇게 30분쯤 갔을까. 무릎을 붙인 채 멀뚱멀뚱 앉아 있기를 그만두고 뱃머리로 나가 앉았다가 이내 뒤로 누워버렸다. 아래층 선실에 침대와 소파도 있는데 굳이 위험한 뱃머리에 누워 있으려니 적당한 스릴과 함께 엔진이 온몸으로 느껴져 덜덜 흔들리지만, 그에 익숙해지면 이내 바다의 결이 등부터 전해진다. 뱃머리가 파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배가 움직일 때마다 누운 몸이 함께 넘실넘실한다.

얼마나 왔을까. 스키퍼가 손가락 끝으로 바다 저쪽을 가리켰다. 취재팀과 동행했던 프랑스인 포토그래퍼가 벌떡 일어나 카메라를 든 것도 이 무렵이다. 누군가 한 짝 흘리고 간 듯한 슬리퍼를 닮은 섬에 점점 가까워지자 무인도 같아 보이는 이 섬에 뭐 볼 게 있다고 왔나 싶다. 꼭대기에 등대만 하나 덩그러니 서 있을 뿐 인기척도 없던 섬에 내려 어슬렁거리려니 나무 틈에서 사람의 움직임이 보인다. 스키퍼가 저 사람이 섬의 등대지기라고 일러주며, 영어를 못하지만 섬을 구경시켜 줄 거라며 따라가 보란다. 조개껍데기가 가지런히 박힌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정상에는 작은 건물 하나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등대지기와 그의 아내만이 머무는 작은 섬이었던 것이다. 3층의 등대로 올라가니 360도로 확 트인 공간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온통 푸른 아드리아 해가 전부다. 무섭기는커녕 청명한 햇살과 더 청명한 공기를 마시느라 심호흡을 하며 한참을 서 있으려니 등대지기가 내려가자는 손짓을 한다. 찌지직거리는 TV와 스프링이 삐죽 솟아나온 오래된 소파, 아귀가 맞지 않는 서랍장, 비닐로 대충 위를 덮은 나무 탁자가 살림의 거의 전부인 작은 방에 들어가 앉아 있으려니 사람 좋은 웃음이 얼굴에 가득한 아주머니가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꺼내온다. 유리컵 가득 오렌지 주스를 따라주며 마시라는 눈짓을 하더니 “카파?” 한다. 아마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그 좋아하는 커피를 못 마시는 일은 없을 테다. 커피, 아니면 카페. 그 비슷한 단어로 거의 통하니 못 알아들을 래야 모를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작은 부엌으로 들어가 뚝딱 커피를 끓여 오신 아주머니는 또 의자에 앉아 벙긋이 웃고만 있다. 출장이 되었든, 여행이 되었든, 어느 곳에서도 간단한 영어는 통했던 것 같은데 이처럼 소통이 안 되기도 처음이다. 난생 처음 접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기분으로 연방 벙글벙글 웃기만 하다가 돌아왔는데 두브로브니크에서의 일정을 회상하며 원고를 쓰는 지금, 왜 그 등대지기 부부가 유독 기억에 남는지 모를 일이다.

등대에 올랐다가 방에 잠시 앉아 차 한 잔 마시고 내려왔을 뿐인데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부지런히 선착장으로 내려가 대기하고 있던 보트에 오르니 등대지기 아저씨가 출항 준비를 도와준다. 묶어두었던 밧줄을 풀어 배 위로 휙 던져주고선 손을 흔들며 뭐라 뭐라 외치는데 알아들을 수가 있나 원. 꿀 먹은 벙어리 기자가 할 수 있었던 거라곤 열심히 손을 흔들며 또 한 번 씨익- 웃어주는 수밖에.

올리브와 시푸드의 담백한 만남

배를 타고 다시 30분쯤. 두브로브니크 앞바다의 많고 많은 섬 중 어딘가에 닿았다. 사실 두브로브니크에 닿은 이후, ‘예쁘다’라는 감탄사가 그치질 않고 있었기에 새로운 풍광을 봐도 더 놀랍지도 않았다. 뭘 봐도 예쁘고, 아직 보지 않았어도 감동이 그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역시 파란 바다를 건너 물빛이 초록색으로 변할 때쯤, 바다를 향해 둥글게 난 만으로 접어들어 배를 대고 섬으로 올라섰다.

점심식사를 위해 들른 이곳은 시판(Sipan) 섬. 다시 차를 타고 나지막하지만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올라 반대편의 경사를 향해 내려갈 때쯤 또 한 번 감탄사가 터진다. 물론 등대지기가 지키고 있었을 뿐인 세인트 안드리아 섬보다는 훨씬 크지만, 두브로브니크에 비하면 작은 이 아담한 섬마을에는 ‘아기자기’란 수식어가 꼭 어울린다. 호텔도 있고 민박도 있지만, 코르출라 섬만큼 유명하지 않아 그런지 한적하다. 마치 배를 탄 기분으로 일렁이며 바닷가 선착장과 거의 맞닿아 있는 레스토랑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으려니 섬의 앞바다에서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 요리가 속속 테이블로 옮겨진다. 신선한 토마토와 올리브, 모짜렐라 치즈에 파슬리 가루를 뿌려 내는 샐러드, 잘게 자른 오징어를 올리브와 함께 조리한 메뉴에 이어 한국에서 흔히 보던 오징어보다 훨씬 몸통이 작고, 살이 연한 오징어 요리와 오븐에 바삭하게 구워낸 생선까지, 해산물로만 구성된 풀코스 요리가 등장했다. 게다가 이곳의 음식은 맵거나 짠 양념 없이 인근 코르출라 섬에서 나는 신선한 올리브로 만든 올리브유만을 소스로 써서 그런지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올리브를 좋아하지만 가끔 아주 시거나 짠 올리브에 허를 찔린 적이 있는지라 샐러드에 얹힌 올리브를 조심스레 베어 무는데 역시 담백하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 웬만한 해산물은 다 좋아하지만 유독 꺼리는 것이 오징어였는데, 올리브유가 원인인지 오징어 종이 다른 건지, 시판 섬에서 먹는 오징어는 그렇게 연하고 부드러울 수가 없다. 호밀빵을 조금씩 뜯어 오징어 요리에 쓰이고 남은 올리브유를 찍어 먹는데도 비리지 않은 맛에 감동하며 썩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냈다.

다시 낮은 언덕을 넘어 보트가 대기 중인 선착장으로 향한다. 관광객을 가득 태운 바이킹선 모양의 배가 항구를 막 벗어나고 있고, 슬로베니아에서 이곳까지 바람을 가르며 요트를 타고 왔다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배에 걸터앉아 맥주를 마시며 여자들만큼의 수다를 풀어내고 있었다. 이제 다시 보트에 올라타고 예쁘게 출렁이는 파란 바다를 건너 오밀조밀 붉은 지붕의 집들이 기다리는 두브로브니크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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