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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적 삶의 여유

이름: 관리자 ㅣ 작성일 : 2008-12-04 오후 1:23:57

프로방스적 삶의 여유

가로등 불빛조차 귀할 정도로 캄캄한 암흑으로 뒤덮인 프로방스로 가는 길. 가만히 눈을 감고 사방에 펼쳐진 검은색 도화지 위에 색색으로 뒤덮인 동화를 그려본다. 그림 속 프로방스에는 화사한 햇살 아래 넓게 펼쳐진 라벤더 정원과 따뜻한 색감의 자그만 2층 집이 그려져 있다. 그곳은 눈부신 설렘과 느긋한 여유로 가득했다.

글, 사진 한미영 기자 |

10시간의 비행 후 파리 공항에 도착해 또 다시 비행기를 타고 마르세유 공항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보딩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새벽부터 서둘렀던 것을 생각하면 꼬박 24시간의 연장선상을 달리고 있었다. 기나긴 여정 끝에 도착한 마르세유 공항 하늘에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유난히 햇빛 인심이 좋다는 프로방스로 가는 길에 비가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방스에서 비오는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다면 보기 드문 풍경과 시작된 이번 일정은 오히려 행운으로 가득할지도 모른다. 그래, 무슨 일이든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프로방스는 이름만으로도 훈훈한 바람이 가슴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이러한 감정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은 프로방스를 사랑했던 수많은 예술가들의 흔적을 통해 알 수 있다. 마네, 고흐, 고갱 등은 도시 생활에 지쳐, 철새처럼 프랑스 남쪽을 향해 이동했다. 이들 뿐만 아니다. 세잔, 피카소, 르누아르, 알퐁스 도데, 에밀 졸라, 알베르 카뮈…. 프로방스가 수많은 예술가의 끝없이 순수한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국 출신 작가 피터 메일(Peter Mayle)은 뽀송뽀송하고 순박한 프로방스의 풍경에 흠뻑 빠져 음울한 영국을 떠나 프로방스로 이민을 떠났다. 프로방스 행을 결심한 또 한 사람이 있으니 세계적인 출판사 랜덤하우스의 편집장 피터 게더스다. ‘노튼 3부작’으로 불리는 세 권의 책 ‘파리에 간 고양이’ ‘프로방스에 간 고양이’ ‘마지막 여행을 떠난 고양이’의 저자인 그도, 세계를 여행한 특별한 고양이 노튼도 프로방스의 여유로운 생활을 만끽했다.

예술가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줬던 프로방스는 수많은 예술가의 연인이고, 나의 연인이자 그대의 연인이다. 드넓은 와이너리 혹은 아기자기한 허브 꽃이 피어 있는 넓은 정원, 누런 빛깔의 흙으로 만든 집 사이로 들어오는 화사한 햇살이 프로방스 특유의 여유로움을 만들어낸다.

오트 프로방스 농가의 아침, 마노스크

수십 년 동안 메마른 땅에 나무를 심어 생명의 땅으로 만든 양치기에 대한 이야기,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Jean Giono)의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곳이 바로 오트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 마노스크(Manosque)다. 뤼베롱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이 지역은 지오노의 고향이기도 하다. 마르세유에서 한 시간 정도 달리는 동안 만나는 풍경은 깎아지른듯한 절벽과 드넓은 땅이다. 간간이 동화 속 그림처럼 작은 농가가 놓여져 있다. 그곳을 살짝 들여다보면 강아지, 닭, 오리, 염소가 나름의 언어로 제각각 인사를 할 것만 같다.

프로방스 사람들은 유기농 삶을 산다. 먹는 음식부터 생활 습관까지 몸과 마음에 ‘웰빙’이라는 단어가 깊이 박혀 있다.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라벤더를 이용해 전통 방법으로 에센셜 오일을 만들어 사용하고, 거친 호밀빵에 올리브 오일을 찍어 먹는다. 이러한 프로방스 농가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라 바스티드 드 라드레(La Bastide de L’Adrech) 같은 곳은 도심 생활에 지친 도시인에게는 새로운 활력을 줄 수도 있다. 18세기에 지어졌다가 약 100년간 버려졌던 농가를 개조해 민박 및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 이곳은 소박한 프로방스 시골집 그대로다. 페치카에 나무 토막을 던져놓고, 커다란 식탁 앞에 앉으면 요리사 출신 주인 아저씨가 커다란 접시에 요리를 가지고 나온다. 그 사이 주인 아주머니는 유리잔에 밤 시럽과 화이트 와인 한 잔을 따라준다. 페치카에서 올라오는 훈훈한 열기와 창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이 식탁에 둘러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떠는 행복한 사람들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덥혀준다.

중세의 도시, 아비뇽의 하루

해질녘 아비뇽(Avignon)으로 들어가는 길, 높은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데 왠지 을씨년스런 기분이 든다. 잠시 동안 느꼈던 스산한 기분은 론(Rh ne) 강가를 산책하며 수그러든다. 론 강 위에는 끊어진 다리가 하나 놓여져 있는데, 아비뇽 다리(Pont d’Avignon)라고도 불리는 생베네제교(Pont Saint Benezet)는 원래 강 건너편 필리프 왕의 탑으로 이어지는 다리다. 홍수로 인해 지금은 4개의 교각과 생베네제를 기리는 생니콜라 예배당만 남아 있다.

7월 아비뇽 연극 축제로 더욱 유명한 아비뇽은 도시 전체가 고성이다. 교황이 머물던 곳이라 그런지 마치 프랑스 안에 로마가 존재하는 것 같다. 거대한 성벽 안으로 들어서면 좁은 골목들이 나타난다. 골목을 따라 이리저리 돌다 보면 종국에는 교황청으로 향하게 된다. 세계사 시간에도 들은 적이 있는 ‘아비뇽의 유수’의 현장이다. 1309년부터 70년 가까이 로마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긴 사건이다. 따지고 보면 교황이 교황청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귀양을 산 것이나 다름 없는데 아비뇽의 교황청은 굉장히 호화스럽다. 유수 시대를 중세 교황권의 몰락기로 간주하기에는 어폐가 있어 보인다. 어찌 됐건 당시 아비뇽 교황청은 전쟁도 없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고딕 양식 건축물인 이곳은 수 세기 후에 전쟁 병기 제작소로 사용되었음에도 당시의 그림이나 조각들은 기적처럼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신이 아비뇽을 지켜준 게 아닌가 싶다.

교황청을 둘러보고 난 후, 시청 앞에 즐비한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가 시내 산책을 나섰다. 각종 숍이 늘어선 조제프 베르네 거리에서 쇼핑을 즐기거나 친환경 건물 외관이 이색적인 레알 마켓(Les Halles)에서 쿠킹 클래스에 참여하거나, 장을 보는 아비뇽 사람들의 생활을 살짝 엿보는 것도 재미있다.

소르그 위의 작은 섬, 일 쉬르 라 소르그

아비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좁고 긴 하천이 흐르는 예쁜 마을이 있다. ‘프로방스의 베니스’라 불리는 일 쉬르 라 소르그(L’Isle-sur-la Sorgue)는 소르그 위의 작은 섬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졌다. 이곳은 매주 일요일이면 앤티크 숍이 모여 있는 소르그 강 주변에 기다란 벼룩 시장이 열리는데, 커다란 핸드밀, 어느 집 주방에 붙어 있었을 작은 찬장 등 손때 묻은 물건이 가득하다. 빈티지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자꾸만 물건을 사고 싶은 충동이 샘솟는다. 시장 안쪽으로는 싱싱한 과일은 물론, 후추통, 천연 비누 같이 각종 생활용품을 만날 수 있다. 그냥 관광객이 되어 시장과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일 쉬르 라 소르그의 일일 주민이 되어 장을 본다면 그들의 생활에 묻힐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예쁜 하천 옆 노천 카페에 앉아 사랑스런 햇살을 받으며 즐기는 에스프레소 한잔이 더할 나위 없이 향기롭다.

청계천 정도나 될만한 소르그 강은 지난 세월 동안 이 지역 사람들의 생명줄이나 다름 없었다. 거대한 물레방아를 돌려 발전을 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라벤더 등의 허브를 이용해 천연 비누를 만들어 팔았다. 작은 마을이지만 산업이 발달해 지금까지도 꽤나 ‘잘 사는 동네’로 꼽힌다고 한다. 물레방아는 지금도 돌아가고 있으며, 하천 주변은 프로방스 사람들은 물론 프로방스의 따뜻함을 느끼고자 찾아든 전세계 관광객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붉은 색을 입은 루시용

프랑스 여행을 하다 보면 작은 규모지만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마을을 선정한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하나’라는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다. 프로방스 보클뤼즈(Vaucluse) 지역에는 140여 개 중 7개의 아름다운 마을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붉은색 옷을 입은 루시용(Roussillon)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우선 이 마을은 온통 황톳빛이다. 붉은 벽덧문에는 하늘색, 연두색, 노란색의 예쁘게 칠해져 있다.

루시용 전체가 붉은 옷을 입은 이유는 황토 채석장에 들어가 보면 알게 된다. 어두운 색 신발을 신으라는 경고를 이해하는 순간이다. 하늘에서 거대한 물감을 쏟아 부은 듯 노랗고 빨간 산 곳곳이 파헤쳐져 있었다. 안료의 재료로 쓰인다는 말에 참지 못하고 흙을 집어 보았다가 붉게 물든 손을 어찌하지 못했다. 발바닥이 온통 붉게 물든 고양이를 보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할걸… . 이 황토빛 마을은 석양이 물들 무렵 더욱 반짝거렸다. 마을 곳곳에는 색모래로 그린 그림과 유리 공예 작품들이 전시된 갤러리와 공예품 숍이 즐비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석양을 아래 불타오르는 붉은 마을을 내려다보며, 커피 한잔과 함께 행복했던 프로방스 기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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